사람 대신 죽어가는 실험동물·모델생물에 감사의 마음을...
바이러스, 초파리부터 침팬지까지 모델생물의 세계
흔히 ‘모르모트’라 하면 인체를 대신한 실험 등에 많이 쓰이는 생쥐 비슷하게 생긴 동물을 의미하는데, 또는 실험동물 전체를 대명사처럼 지칭하기도 한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온갖 실험적 요구를 다 들어줘야 하는 출연자를 가리켜 ‘모르모트 OO’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일찍부터 실험용으로 쓰였던 이 동물이 유럽에 서식하는 다람쥐의 일종인 마머트(Marmot)와 비슷하게 생겨서 이런 혼동이 생긴 것이다. 동물 분류상 쥐목(目) 천축서과에 속하는 이 동물의 정식 명칭은 기니피그(Guinea pig)로서 실험동물뿐 아니라 애완용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원산지인 남아메리카에서는 ‘꾸이’라고 불리며 식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포유동물 중에서 실험동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기니피그, 쥐와 생쥐가 속한 설치류 즉 쥐목의 동물이며, 개나 돼지 등 다른 동물들도 널리 쓰인다. 신약 개발이나 독성시험을 비롯한 온갖 위험한 실험과정에서 인간을 위하여 희생되는 실험동물들은 국내에서만 한해 수백만 마리에 이를 정도이다.
그러나 인간이 속한 포유류의 동물이라 해도 이들 동물실험만으로 신약의 안전성을 검증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1950년대에 독일에서 출시되었던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라는 약품은 임산부들의 입덧방지제, 수면제로 각광 받았다. 하지만 이후 팔다리 등이 없는 기형아가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1만 명 이상 출생하는 사상 최악의 약물 부작용 사태를 낳은 바 있다.
동물실험 결과 아무런 부작용이 없었지만, 쥐와 사람은 유전자 등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다행히도 미국에서는 그 차이를 신중하게 생각하여 약품 출시를 허가하지 않은 식품의약국 책임자 덕분에 피해자가 거의 없었다. 이후로는 사람에 훨씬 더 가까운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의 동물을 실험에 포함하게 되었으나, 이 또한 윤리적 문제를 비롯한 반론이 제기되며 논란이 되어 왔다.
한편으로는 각종 실험에 유용하게 사용되면서 생명과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해 온 생물들이 반드시 인간과 매우 유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진화해 왔기에, 차이점 못지않게 공통점도 많기 때문이다.
개에게 먹이를 줄 때마다 종을 쳐서 조건 반사의 원리를 밝혀낸 파블로프(Pavlov)의 사례는 유명하다. 유전법칙을 최초로 규명한 선구자였던 오스트리아의 멘델(Mendel) 신부가 오랫동안 실험에 사용했던 것은 동물도 아닌 완두콩이라는 식물이었다. 오늘날에도 애기장대, 고구마, 벼 등 여러 식물이 실험과 작물 연구에 사용된다. 따라서 실험동물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서, 생물학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연구에 사용하는 생물들을 ‘모델생물(Model organism)’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름철에 음식에 꼬이는 초파리는 대부분 사람에게 귀찮은 존재이겠지만, 유전학을 비롯하여 여러 생물학 분야에서는 매우 귀중한 모델생물이다. 멘델의 후계자격인 토머스 모건(Thomas Morgan)은 바로 초파리 실험을 통하여 염색체지도와 유전의 메커니즘을 밝힘으로써 1933년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로도 초파리 관련 연구로부터 노벨상을 받은 경우가 무려 다섯 번 더 나와서, 초파리는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배출(?)한 동물이 되었다. 2017년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또한 "내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초파리 덕분이다. 초파리에게 감사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초파리의 유전자 개수는 사람보다 훨씬 적지만, 의외로 사람과 닮은 점들이 많다. 즉 성별을 결정하는 염색체가 XY형으로서 사람과 같은 유형일 뿐 아니라 사람에게 나타나는 질병과 관련 깊은 유전자의 상당수가 초파리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단맛을 좋아하는 것도 사람과 유사할 뿐 아니라, 사람 중에도 술고래가 있듯이 초파리 중에는 술을 무척 밝히는 것들도 많다고 한다. 그리고 한 세대가 매우 짧고 돌연변이 등의 확인이 쉬운 것도 연구재료로 쓰기에 최적의 조건이어서, 생물학자들은 “초파리는 모델생물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예쁜꼬마선충 또한 최근 모델생물로 매우 사랑받고 있다. 흙 속에서 박테리아를 잡아먹고 사는 이 선형동물(線形動物)은 몸길이가 고작 1mm에 불과하지만, 사육이 쉽고 역시 모델생물로서 여러 장점을 갖추고 있다. 예쁜꼬마선충은 다핵생물 중에서는 유전체 전체가 모두 해독된 최초의 생물이다. 예쁜꼬마선충을 모델로 사용하여 세포의 분화, 사멸과정을 밝힌 생물학자들은 2002년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고, 예쁜꼬마선충을 통한 형광단백질 발현을 연구한 과학자들은 2008년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초파리나 예쁜꼬마선충보다 훨씬 하등의 생물들, 즉 가장 원시적인 생물이라 할 수 있는 바이러스나 대장균, 효모 등도 모델생물로 자주 쓰이면서 분자생물학과 세포생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인간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어가는 수많은 실험동물을 위하여, 국내의 연구소나 병원 중에 위령비를 세우거나 위령제를 지내는 곳들도 있다. 관련 분야 종사자나 과학자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실험동물과 모델생물에게 늘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최성우는 일간신문, 잡지, 온라인 매체 등에 과학칼럼을 연재하고 TV 과학채널 코너에 출연하는 등 과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물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LG전자 연구소 선임연구원, 중소기업 연구소장, 한국사이버대학교 겸임교수 등을 지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과학기술부 정책평가위원, 교육과학기술부 과학기술정책민간협의회 위원 등 과학기술 정책 자문도 맡았다. ‘과학사 X파일’ ‘상상은 미래를 부른다’ ‘대통령을 위한 과학기술, 시대를 통찰하는 안목을 위하여’, ‘진실과 거짓의 과학사’ ‘발명과 발견의 과학사’ ‘과학자, 인간의 과학사’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