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자리, 페미니즘에서 찾다– 황지현
황지현 개인전 '붉은 여왕' 서울 ‘플레이스막2’에서 6일까지
황지현(44) 작가는 2017년 전시 <겪는 순간, 그림의 결과>를 기점으로 작업 방향이 바뀐다. 가족간 관계의 가치를 관점으로 여성의 자궁, 꽃, 가족, 집, 길 등을 소재로 삼는다.
전체적으로 여성으로서 가족내 경험, 사회적 억압 구조에 대항적 성향의 표현이 농후하다. ‘대항(counter)’은 가족내 가부장 권력의 이해와 상충한다. 한국 사회는 '효' 정서가 강하다. 긍정적 한계치를 벗어나 억압이나 권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황지현은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활용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Feminism·여성주의)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유교자본주의가 근간인 한국 사회 집안 가장의 권위는 대체로 경제력에서 나온다. 가족의 보편적 지위와 역할 관계는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돈=경제력’, ‘어머니는 밥=생활’로 인식되어 있다. 청소년기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남성상을, 딸은 어머니를 통해 여성성을 배운다.
작품 〈껍데기, 2016년>에서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은 묵직한 가방 속 서류가 모티브이다. 주변 아기 형상은 직업이 회계사인 부친의 가족 부양 책임감을 나타낸다. 결혼 이후 시작한 대학원 박사 과정도 부친의 권유이다.
작가가 부모에게 의존하던 2010년대 초반 작업한 ‘쉘터 시리즈(Shelter Series)’에 등장하는 집은 ‘현실보다 이상적인 심리적 공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거주하는 물리적인 ‘집(house)’은 ‘기호(signage)’의 의미를 갖는다.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건축의 이론가·건축가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1925~2018)와 데니스 스콧 브라운(Denise Scott Brown·1931~ ) 부부는, 기호와 거주공간(shelter)으로 구성된 건축의 복합성을 재조명하였다. 스콧 브라운은 “건축에서 (signage, shelter를 제외한) 컨텍스트(context·맥락)는 물리적일 뿐 아니라 시공간의 사회, 문화적 패턴을 포함한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순한 것은 지루하다(Less is bore)’를 명제로 한다.
작가에게 가족의 의미가 강한 ‘집(home)’은 가장 빈번하게 마주치는 ‘경험의 장소’이다. 쉘터 시리즈에는 양가감정이 존재한다. 부모는 성인이 된 자신에게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자주 얘기했고, 교제하는 이성이 (경제적으로 취약한) 작가 직업군이기에 탐탁치 않아 했다. 작가는 집을 가족과 부딪히는 어려움이나 부정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행복만이 존재하는 이상향의 모습으로 그렸다. 이후 여성으로서 자아에 대해 탐색하며 작업이 변화하였다.
작품 〈경배〉는 할머니의 죽음과 장례 절차를 진행하며 겪은 장면들로 구성하였다. 할머니의 죽음을 묘지의 비석으로, 성가를 부르는 사람들의 모습 등을 그려 넣었다. 필자는 주검 앞에 병풍처럼 둘러싼 두건 쓴 조문객들을 조각에 가까운 무게감을 가진 선으로 그려낸 니콜라이신(신순남·니콜라이 세르게이예비치·1928~2006년)의 작품을 연상하였다.
통상 여성 예술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르로 인물화의 연장선으로 누드에 천착한 것과 달리 황지현은 꽃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또는 알레고리(allegory·은유)의 매개 수단으로 삼았다. 여성이 나이들면 매력 없다는 외모지상주의 시선에도 대항한다. 꽃은 계절의 변화에 시들어가는 게 자연스럽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황지현의 꽃 그림은 대개 데칼코마니 구도를 특징으로 한다. 독일 작가 카타리나 프릿츠(Katharina Fritsch·1956~ ) 로사 루이( Rosa Loy·1958~ )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도플갱어 구도를 가져온듯 하다. 조각가 카타리나 프릿츠는 2022년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 ‘녹색의 코끼리상’을 등장시켰다. 코끼리 사회에서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는 늙은 암코끼리다. 인간의 역사에도 모계 사회가 있었음을 드러내려는 상징이고 장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족구성원으로 지녔던 내부자 시선(from the native's point of view)을 시대와 사회를 보는 외부 지향적 시선과도 결합하려고 했다.
유대교 신화와 그리스 신화에서 각각 악녀로 묘사된 릴리스(Lilith)와 메두사는 남성을 리드하는 주체적 존재로 표현하였다. 유대 신화에 따르면 하느님은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했다. 아담(Adam)과 릴리스다. 릴리스가 아담의 첫 번째 아내였다는 주장이다.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도 릴리스가 등장한다. 릴리스가 도망간(추방된) 뒤, 여호와는 아담의 갈빗대를 취해 이브를 만들었다. 이브는 릴리스와 달리 순종적이고 희생적 의미이다.
1990년대, 작가 이숙자(1942~ )는 정면성(正面性)을 특징으로 하는 ‘이브의 보리밭’ 연작으로 여성(의 몸)을 향한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을 비판하였다. ‘이브의 보리밭’ 연작은 ‘토속적 에로티시즘’이라는 ‘언설’(discourse)이 붙여져 진지한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여전한 남성 주류 시각은 불편한 여성 누드를 순수 예술에서 배제하려 한 마초이즘 프레임의 소산이다.
가톨릭에서 여성 신자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최고의 제사인 미사에 참례하며 미사보(베일)를 쓴다. 십자고상, 베일 등 성물(聖物)은 하느님께 이르는 매개이다. 성전에서 베일은 악도 선도 가리며 내면의 공간을 제공, 자신을 들여다보며 깊은 곳에 이르러 고요해지기를 기다리게 하는 순기능이 있다. 황지현은 여성만이 착용하는 베일을 성차별적인 매개로 이해한다.
캔버스는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실제 공간을 위한 가상의 틀이다. 작업 과정 중에는 물감 부딪히는 속도, 텍스쳐(texture·미묘한 느낌) 등이 중요하다. 과슈와 아크릴을 주로 사용하며 더해지는 붓질에서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가는 미에 이르는 최선의 선택으로 재료와 자기만의 기법으로 작품을 만든다.
2024년 황지현은 모교에서 논문 <여성의 다면성을 표현한 알레고리 회화 연구- 본인의 ‘겪는 순간, 그림의 결과’ 연작을 중심으로>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론은 작업을 수반하며, 작업은 이론화가 따라야 한다. 세상의 흐름을 바꾸는 변화나 문화사의 주요 변곡점들의 특징이다.
20세기 초반에 나타난 페미니즘은 유럽에서 시작되어 세기 중반부터 젠더(Gender) 등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담론으로 발전한다. 여성 작가들에 의해 페미니즘 미술은 현대 미술의 중심 사조로 진입하였다. 페미니즘은 자칫 르상티망(ressentiment)의 감정을 초래할 수 있다. 르상티망은 원한, 시샘, 질투심, 복수심 등의 의미를 지닌다. 니체는 이를 강자에 대한 약자의 자연스러운 자기방어 기제로 처음 개념화했다.
황지현 개인전 <붉은 여왕>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플레이스막2’에서 2월 6일까지이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