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불완전하지만 직관을 따른다- 조각가 엄혁용
[심정택의 미술작가평론 미술딜라이트]
한국의 전통 책장인 서가도(書架圖), 장정되지 않은 너덜너덜해진 종이, 책의 모서리 부분이 포개어진 그림 등. 한지로 만든 천자문 책자를 찢어 부조와 설치 작품으로도 확장한다. 책을 소재 및 주제로 삼고 재료로 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조각가 엄혁용(64·전북대 예술대 교수)이 2010년대에 본격화한 책 작업 <사유의 공간> 시리즈는 재료가 나무에서 알루미늄으로 바뀐다. 작품의 표면은 마치 금속에 시멘트와 몰타르를 섞어 바른 듯하다.
작가는 나무를 포기하지 않았다. 최근 방문한 전북 김제군 용지 작업실에는 나무 물성 본연과 용도까지 고려한 미발표 가구(?)가 제작되고 있었다. 엄혁용의 최근 금속 작품은 형태를 벗어난 ‘앵포르멜’(inform)을 지향한다.
엄혁용은 2011년 11월말. 일명 '직지 대모'로 알려진 박병선(1929~2011) 박사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현충원에 안치됐을 때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직지(直指)는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이다. 현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만이 존재한다. 서양의 인쇄 문명을 발달시킨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섰다.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목판 활자본이 있었기에 금속활자본이 존재한다.
엄혁용은 합판, MDF, 원목 판재인 집성목과 더불어 통나무 자체를 사용하였다. 느티나무, 소나무, 밤나무, 감나무, 팽나무 등 수종을 가리지 않는다. 벌레 먹고 썩은, 자연 고사된 나무를 체인톱으로 자르다 보면 뽀얀 속살이 드러난다. 나무 물성이 가진 ‘사각사각’, ‘톡톡톡’ 같은 소리가 좋았다.
2011년, 2012년 <직지(直指), 새로운 천년의 꿈을 꾸다> 를 타이틀로 세 번에 걸친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한지를 사용하였고 상감기법을 적용하였다. 엄혁용은 나무가 갖는 질긴 생명력이 직지와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고민했다. ‘직지’ 시리즈는 나무, 돌, 청동으로 만든 작품으로 다양화해갔다.
직지 시리즈는 책을 원하는 만큼 빼내고 책장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작품 곳곳에 작은 크기로 홈을 파 종이 찰흙 같은 물 한지를 넣기도 하고, 고서를 도첩하듯 실리콘으로 책 조각을 제본했다. 꽃과 얼굴도 새겨 넣었다. 나무 책들은 눕혀지고 세워지고 쌓이거나 책 나무에 과일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 등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냈다.
2014년 <완판본, 세월의 책 꽃이 되다> 전시를 가졌다. 그는 책에 5개의 구멍을 내 속지, 표지 등을 고정한 오침안정법을 쓴 (전주판소리)완판본 책 조각에 민화의 초충도(草蟲圖)를 접목, 나무, 꽃, 나비, 구름 등을 음각·채색하였다.
동(銅)으로 만든 3m 40㎝ 높이의 책 탑에 나무로 조각한 완판본이 올려졌다. 현대미술에서 ‘발견된 오브제’인 금속과 나무를 접목해 자연과 산업을, 과거와 현재를 연결했다.
2015년 전시에서는 나무를 금속으로 바꾸었다. 전시장 한 벽면을 5~20㎝ 길이의 책 조각 900여개로 채웠다.
30대로 거슬러 올라간 초기 작품 대부분은 금속을 재료로 사용하였고, 알루미늄과 철, 철과 강화유리, 도자기 조각(陶彫), 스테인리스스틸을 거쳐 나무로 넘어왔고 다시 알루미늄으로 넘어간다. 엄혁용 작업은 사물의 외형보다 물성 자체를 탐구하는 맥락 ‘날것의 예술(tachism)’은 그대로이다.
2024년부터 작업 방향이 바뀌고 있다. 책의 원소 측면을 부각 또는 확대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 책이라는 형상을 버리고 종이가 켜켜이 쌓인 측단면에 주목한다.
재료는 젊은 시절 천착했던 알루미늄으로 완전히 회귀했다. 물리적으로 노동이 가능한 근력이 떨어지면서 대상의 전체보다는 부분에서 조각가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알루미늄은 소재가 가진 무게에 장점이 있다. 웬만한 크기는 혼자서도 들 수 있다.
알루미늄 평판을 플라즈마 절단기로 붓질하듯이 쓸어내리며 책의 측단면 집합, ‘책 등’의 반대쪽 종이가 쌓인 형태의 ‘나란한 선(線)’의 집합을 위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스크래치로 표현된다. 회화적 터치만으로 화면 전체를 한 번의 붓질로 덮는 전면일필법(全面一筆法)을 대입한 듯하다. 표면은 마치 잘게 꾸겨진 포장재를 오브제(objet)로 사용, 앗상블라주(assemblage·집적· 集積)로 만든듯 하다.
엄혁용 조각가는 40여년 걸어온 길을 성찰, 잘 만든다는 생각보다는 과거의 경험과 생각 등을 정리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국내 조각계는 1980년대와 1990년대초까지 영국 조각가 앤서니 카로(Anthony Caro, 1924~2013) 풍이 유행했다. 카로 작품은 무의식적 관념이 그리는 공간을 제시, 조각과 공간 모두를 자유롭게 한다. '발견된 오브제'와 미니멀리스트 구조물이 결합된 게 특징이다. 예술은 손으로 만든 것과 기계로 만든 것 사이의 접합들이 어색해 늘 불완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품과 설치 공간의 구분을 없앴다는 평가를 받는다. 엄혁용은 무엇보다 카로의 직관성에 주목했다.
당시 알루미늄 소재는 조각가 박석원(1942~ )이 주물 형태로는 만들었으나 판형 작품은 없었다. 모든 금속 주물은 기포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밀도가 무너지면서 썪는다. 판과 판을 볼트 너트로 결합했다. 아르곤 용접이 알려지지 않을 때였다.
그는 미술교육자로서도 최선을 다한다. 엄혁용은 대학에서 마땅히 기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게 있다는 주장이다. 제자들이 쉽게 영상이나 미디어 아트로 옮기는걸 경계한다. 그들이 미술 생태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치려 든다. 중국인 제자들 7명은 중국 대륙 전체에 흩어져 작가,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
엄혁용은 2022년부터 아트테라피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다. 조건부 기소유예를 받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맞춤형 예술 교육이다. 기수당 10∼15명의 소년범은 일주일에 한 번, 2시간 30분씩 총 10번 전북대 예술대학으로 와서 미술 전공자들에게 교육받는다. 교육 결과물로 전시를 가지며 전주지검장과 전북대 총장 직인이 찍힌 수료증을 받는다.
엄혁용은 " 청소년들은 예술로 분노를 표출하면서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과거를 직면하면서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처음 수업에는 크게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 태도를 보이지만, 세번 정도 교육을 받으면 적극적으로 태도가 바뀐다고 한다.
엄혁용은 2024년 3월 제13대 한국기초조형학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임기는 2026년까지 총 2년이다. 학회는 예술·디자인 전 분야에 관계된 ‘기초조형’을 중심으로 학문적 위상을 정립하고, ‘창조적 조형’의 사회적 구현을 위해 활동한다. 약 1만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