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함을 사후 평가받은 라흐마니노프 vs 이데올로기 광풍에 희생된 프로코피예프

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시리즈 22 낭만-현대 격변기의 러시아 음악가들 '라흐마니노프 & 프로코피예프' (9)

2024-12-15     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 배경에는 패권주의와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의 패권다툼에서 비롯된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이성적 존재라고 여겨졌던 인류가 사실은 파괴적이고 허무한 존재였다는 정신적 각성이 일어났다. 근대주의는 한계를 노출했고, 이를 극복하려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도들이 펼쳐졌다.

20세기 후반기는 이데올로기 대결로 특징지어진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로 세계는 동서방과  제3 세계로 나뉘어 체제경쟁을 해왔다. 40년에 걸친 경주 끝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이데올로기의 우열은 분명히 드러난 듯 보였다. 이 격변의 세상 속에 문화예술 역시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클래식 음악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리허설 도중 상의하는 라흐마니노프와 유진 오먼디.


사후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은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1873~1943)는 미국 망명 후 대서양의 양쪽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장기간에 걸친 무리는 결국 건강 문제로 되돌아왔다. 그는 망명 이후 작곡가로서보다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떨쳤고, 작곡에 대한 아쉬움을 여러 차례 토로했다. 돈이 되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연주 요청이 너무 많아 그는 오케스트라 지휘도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라흐마니노프는 1893년 오페라 <알레코>(Aleko)로 지휘 데뷔 후 1897년에 정식 지휘를 시작해 1914년까지 매년 지휘자로 무대에 선 바 있다. 1917년 러시아를 영구히 떠난 후에는 지휘자로서 포디움에 선 것은 단 7번뿐이었다.

다행스럽게 그는 녹음을 많이 남겼다. 스스로는 라이브 연주야말로 클래식 음악의 핵심이라 여겨 녹음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경제적 필요와 명성의 유지를 위해서는 피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작품을 녹음할 때 완벽함을 추구했으며, 만족할 때까지 다시 녹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슈만의 ‘카니발’(Carnaval)과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2번, 여러 소품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궁합이 잘 맞다고 생각했는지 피아노 협주곡 4개를 모두 협연 녹음했다. 1, 3, 4번 협주곡은 1939~1941년에 유진 오먼디(Eugene Ormandy)와 함께 녹음했고, 2번 협주곡의 두 버전은 1924년과 1929년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의 지휘로 각각 녹음했다. 스토코프스키와는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를 초연(1934년)한 직후 녹음까지 바로 진행한 바 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는 지휘봉을 들어 녹음한 3개의 음반 외에도 자신의 교향곡 3번, 교향시 ‘죽음의 섬’, 그리고 ‘보칼리제’(Vocalise)의 오케스트라 편곡판을 녹음해 끈끈한 인연을 증명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또한 친구인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의 제안으로 아메리칸 피아노제작사(American Piano Company·약칭 Ampico)의 자동재생 피아노를 위해 여러 피아노 롤(piano roll)을 남겼다. 1919년부터 10년간 만든 총 35개의 피아노 롤 가운데 12개는 그가 직접 작곡한 것이었다. 피아노 롤을 제작한 작품 중 29개는 축음기를 위한 녹음도 병행해 자기 작품 해석의 일관성을 입증했다.

20세기 초반 작곡의 세계에서 동료 망명자인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가 화성과 리듬에 대한 급진적인 실험으로 음악계를 지배하는 동안 낭만적이고 선율적이며 갈망하는 듯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과거의 유령, 19세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집착의 소산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그러한 평가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소 우울하고 내성적이라고 여겨졌던 그는 절친한 친구들 앞에서는 장난기 있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그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을 보여주기도 했다. 

60대 후반 들어 여러 가지 합병증이 찾아온 라흐마니노프의 건강은 1943년 3월 마지막 주에 급격히 악화되었다. 식욕을 잃었고 팔과 옆구리에 지속적인 통증을 느꼈으며 호흡마저 점점 더 어려워진 라흐마니노프는 3월 26일에 의식을 잃었고 이틀 후 베벌리 힐스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의 장례식은 캘리포니아 주 실버레이크의 러시아 정교회 소속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열렸다. 라흐마니노프는 친구인 음악가 스크랴빈(Scriabin), 타네예프(Taneyev), 극작가 체홉(Chekhov)이 묻힌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Novodevichy) 묘지에 묻히기를 바란다고 유언장에 명시했지만, 그의 미국 시민권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그는 뉴욕주 발할라(Valhalla)에 있는 켄시코(Kensico) 묘지에 안장되었다.

모스크바의 라흐마니노프 동상.


그의 사후 파리의 라흐마니노프 음악원과 소련 내 그의 출생지와 가까운 벨리키 노브고로드(Veliky Novgorod)와 탐보프(Tambov)에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된 거리가 생겼다. 1986년 모스크바 음악원은 그를 위한 콘서트홀을 헌정하여 라흐마니노프 홀로 명명했고, 1999년에는 모스크바에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기념비"가 세워졌다. 한편 별도의 기념비가 2009년 6월 14일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제막되었다. 

테네시 주 녹스빌(Knoxville)의 세계박람회 공원에는 보카레프(Victor Bokarev)의 작품인 "라흐마니노프: 마지막 콘서트"라는 이름의 동상이 작곡가에 대한 추모를 담아 세워져있다. 2019년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에서 알렉산드리아 교향악단이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콘서트에는 식전 행사로 라흐마니노프의 증손녀인 나탈리 하비에르(Natalie Warnamaker Javier)가 라흐마니노프 연구자 크로시아타(Francis Crociata)와 미국 의회도서관의 음악 전문가 리버스(Kate Rivers)와 함께 참여해 라흐마니노프의 공헌에 대한 포럼을 진행했다. 

2019년 영국의 권위있는 BBC 뮤직 매거진은 전세계 저명한 현역 피아노 연주자 100명에게 레코딩 시대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2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1위로 당당히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가 뽑혔고, 이후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 알프레드 코르토가 5위까지 이어졌다. 이후 디누 리파티, 아르투르 슈나벨, 에밀 길렐스, 마르타 아르헤리치,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이그나츠 프리드만, 라두 루푸, 에드빈 피셔, 빌헬름 켐프, 머리 페라이어, 글렌 굴드, 발터 기제킹, 요제프 호프만,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뒤를 이었다. 생존 연주자는 아르헤리치, 지메르만, 페라이어 3인이다. 이 비르투오조들의 목록을 보면 라흐마니노프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지닌 얼마나 위대한 작곡가이자 연주가였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말년에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고생한 프로코피예프 

세르게이 프로코프예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1891~1953)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자타공인 인정을 받아 1948년 2월 10일 크렘린에서 인민 예술가 칭호 수여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미국의 매카시즘(McCarthyism)과 비견되는 예술에 대한 이데올로기의 폭격이 소비에트 연방에서도 터졌고, 인민예술가 프로코피예프도 ‘즈다노프 비판’(Zhdanov Doctrine)으로 불리는 이 광풍에 휩쓸렸다. 

그해 1월 10일 즈다노프의 주재하에 작곡가, 음악가, 음악교사들이 모인 컨퍼런스에서 프로코피예프는 "혁신을 위한 혁신"과 "예술적 교만함"을 이유로 새카만 무명 작곡가 빅토르 벨리(Viktor Bely)에게 질책을 당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 등은 자아비판 연설을 했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이를 거부했다. 그의 침묵은 그가 고의적이며 소비에트에 도전적이고 비협조적이었다는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가 전한 이야기에 의하면 프로코피예프가 옆 사람과 잡담하다가 근처에 앉은 고위 인사가 조용히 하라고 경고하자 프로코피예프는 "제대로 소개받지 않은 사람의 의견에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소비에트작곡가연맹의 수장인 티콘 크렌니코프는 프로코피예프가 무시한 사람이 스탈린의 참모인 마트베이 쉬키리아토프라고 증언했다. 

악보 옆에서 체스를 두는 프로코피예프의 사진.


인민예술가 칭호수여 기념식 다음날 발표된 2월 11일 ‘즈다노프 비판’은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셰발린(Shebalin), 포포프(Popov), 미야스코프스키)Myaskovsky) 순으로 6명의 예술가를 "형식주의"라는 죄명으로 고발했다. "클래식 음악의 기본 원칙을 포기하고" "혼란스럽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운드를 선호했다는 것이었다. "음악을 불협화음으로 바꿔 놓은“ 프로코피예프의 작품 ‘1941년’, ‘전쟁 종식 송가’(Ode to the End of the War), ‘축제 시’(Festive Poem), 10월혁명 30주년 기념 칸타타, ‘알려지지 않은 소년의 발라드’, 1934년 피아노 작품 ‘생각’(Thoughts), 피아노 소나타 6번과 8번 총 8개의 작품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1948년 8월까지 프로코피예프는 심각한 재정적 곤경에 처해 부채가 18만 루블에 달할 정도였다. 

프로코피예프의 만년 오페라 프로젝트 중에는 소비에트 문화 당국을 달래려는 필사적인 시도인 <진짜 남자 이야기>(The Story of a Real Man)가 있었는데, 이것마저 키로프 극장에서 재빨리 취소당했다. 이러한 당국의 의도적 무시와 건강 악화로 인해 프로코피예프는 점차 대중의 관심과 다양한 활동, 심지어 체스에서도 물러났고 점점 더 자신의 작품에 헌신했다. 1949년 7월 7일 뇌졸중을 겪은 프로코피예프에게 의사들은 작곡을 하루 한 시간으로 제한하도록 조치했다.

1949년 봄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와 22세의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 C장조 첼로 소나타 Op. 119를 작곡해 이듬해 초연을 했다. 그는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해 기존의 첼로 협주곡을 대폭 재구성하여 오늘날 첼로와 오케스트라 레퍼토리의 획기적인 작품인 교향곡 협주곡으로 만들어냈다. 그의 마지막 공개 공연 참석은 1952년 10월 11일 최후의 완성작인 교향곡 7번의 초연이었다. 

8년 동안 만성 질환을 앓았던 프로코피예프는 그로부터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1953년 3월 5일 뇌출혈로 인해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하필이면 독재자 요시프 스탈린과 같은 날이었다. 거대한 군중이 모여 스탈린을 애도했던 붉은 광장 근처에 집이 있었기 때문에 장례차가 프로코피예프의 집 근처로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소비에트작곡가연맹 본부에서는 프로코피예프의 장례식을 거행할 수 없다고 통보했고, 3일 후에야 스탈린의 시신을 찾는 군중과 반대 방향 뒷골목을 통해 손으로 시신을 옮겨 간신히 치러진 장례식에는 쇼스타코비치를 포함한 30여명 만이 단촐하게 참석했다. 

프로코피예프의 시신은 같은 세르게이인 라흐마니노프가 원했으나 가지 못했던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소련의 주요 음악 잡지는 115페이지를 스탈린의 죽음으로 채운 후 116페이지 단 한 쪽에 프로코피예프의 죽음을 간략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1957년 그는 유작인 교향곡 7번으로 소련의 최고 영예인 레닌상을 수상하며 명예를 회복했다.

젊은 아내 미라 멘델손은 남겨진 모스크바의 아파트에서 남편의 논문과 음악을 정리하면서 회고록을 쓰는 데 전념했지만, 죽을 때까지 회고록을 완성하지 못했다. 미라는 남편 사후 15년 뒤인 196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때 지갑 안에는 1950년 2월에 작성된 부부의 서명과 함께 "우리는 나란히 묻히고 싶다"라는 쪽지가 남아있었다. 유언대로 그들의 유해는 노보데비치 묘지에 함께 묻혔다.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에 있는 프로코피예프의 무덤.


프랑스 현대음악 6인조중 하나인 오네게르(Arthur Honegger)는 "우리에게 현대음악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고, 미국의 학자 타루스킨(Richard Taruskin)은 "20세기 작곡가들 중에서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독창적인 온음계 멜로디를 쓰는 재능"이라고 프로코피예프를 칭송했지만, 그의 서방에서의 명성은 냉전의 반감으로 인해 떨어졌고 음악 역시 서방 학계와 비평가들로부터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의 음악만큼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에서는 주립 음악원을 프로코피예프의 이름으로 명명했고, 국제공항에도 그 이름을 붙였지만, 2014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그의 이름을 딴 국제 콩쿠르는 매년 키이우에서 개최되며 피아노, 작곡, 지휘의 세 가지 부문으로 구성되는데, 3년째 이어지는 전쟁으로 인해 중단중이다. 한편 얼마 전까지 부천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한 장윤성 서울대 교수가 1993년에 프로코피예프 국제 지휘자 콩쿠르에 2위로 입상하여 한국인 최초로 국제 지휘 콩쿠르 입상의 기록을 세운 바 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2022년 6월부터 뉴스버스에 클래식 관련글을 기고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