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에서 꾼 꿈이 나비가 되어 날다– 정현숙 작가
뉴스버스 심정택의 미술작가 평론 '미술딜라이트' 개인전 '인피니티 일루젼' 용인시 갤러리위에서 12월 7일까지
경남 진주 출생의 정현숙(68) 작가는 서울의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수년 후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 유펜(University of Pennsylvania)으로 진학했다. 페인팅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서구문화권 출신 학생들을 보며 서양화로는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지도 교수 히토시 나가자토(Hitoshi Nakazato·1936~2010)는 정현숙에게 동양적 정서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 김창열 (1929~2021), 이우환(1936~ )을 예로 들며 서구 작가들과의 차별성에 대해 생각해보라 하였다.
정현숙은 귀국후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 색면 추상 작업을 하며 우리 고유의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였다. 수묵과 채색화로 양분되는 전통 회화와 달리 역사가 짧은 근현대 미술에서 한국성(韓國性)을 찾는 일은 어려움이 많았다.
불교의 윤회사상을 상징하는 원, 고려불화에 사용된 석채(石彩), 금니(金泥·금가루) 등을 탐색하며 금색 아크릴로 선을 긋고 번지게 하는 식으로 재료를 연구하였다.
1998년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자개 장롱을 맞부닥치는 순간, ‘이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자개 장롱은 장롱 문짝을 캔버스 삼고 자개를 오브제로 붙인 게 원리 아닌가.
페인팅은 내구성을 지닌 물감 본연이 갖는 물질의 색을 갈아 피아노 건반처럼 배치하는 것이다. 그린다는 것도 캔버스에 물감이라는 오브제를 갖다 붙이는 행위이다.
정현숙은 현대 미술에서 일상의 물건이 오브제로 쓰이듯 자개를 어떻게 조합하느냐는 미술의 본질과 맞닿는 느낌이었다. 페인팅 붓질의 느낌을 자개에 적용하면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신화 중심의 서양 미술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작품 <비너스의 탄생/ 1486년>, 정현숙에게 비너스가 탄생하는 광경은 진주가 조개로부터 현신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자개의 영어 말, ‘진주의 어머니(Mother of Pearl)’는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라는 의미로 와 닿았다. 조개류를 가공한 자개가 동서고금에 미학적, 조형적 가치를 지닌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작가의 주관과 의지가 뚜렷하게 남는 붓터치가 없는 평면 회화이기에, 기하학적 구성이 특징인 선형 위주 옵아트에 적용하는 게 좋을 듯 싶었다.
우리 토양과 해수에서 쉽게 생산할 수 있는 자개(조개 껍데기)를 경남 통영에서 찾았다. 1차 가공된 자개(평)판을 두 가지 단위 요소로 재료화 했다. 라인(line)과 네모, 마름모꼴 등의 스퀘어와 그리드(grid)는 작품 전체의 구성과 특징적 패턴을 만드는 최소 단위로 정했다.
‘차경(借景)’처럼 도상(圖像·icon)을 빌려오다
정현숙은 1999년부터 캔버스에 전통을 상징하는 달항아리, 고정된 평면에 날개 짓 파동 일으킬 것 같은 나비 등 도상 이미지를 차용하고 라인과 그리드를 그물망처럼 엮었다.
이미지(image)의 어원은 죽은 이의 얼굴 본을 뜬 밀랍 주조인 이마고(imago)이다. ‘진짜는 아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객은 습관적으로 형태, 모양이 드러난 이미지를 우선적으로 본다.
원을 주제로 추상 작업을 하며 기하학적 도형과 아울러 원이나 구의 형태인 한국 근대회화기 범용적 도상인 달항아리를 자주 차용하였다. 원이나 구 또는 사각은 한 개의 큰 사이즈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작게 변형되어 갔다.
화면 전체에 오직 하나의 대상을 표현하다 보니 배경이나 대상간 긴장이 없어 밀도가 떨어져 보였다. 점차 작거나 또는 크게 반복적으로 구성하다 보니 삼각, 사각의 형태들은 작가가 몰입과 매몰 사이를 넘나드는 강박 수준의 패턴을 이룬다.
자연으로 눈을 돌리면, 호수, 연못 등 잔잔한 수면은 주변의 풍경을 담는다. 건축물 외부의 인위적 수(水)공간 설정은 일상에서 상징적이며, 경건한 장소로의 전이에 효율적 의미를 지닌다. 물은 자연의 언어, 실상, 순환, 투영의 매개이다.
한국의 전통 화조화(花鳥畫)에서 꽃, 풀, 새는 인간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길상과 기복적 성격을 띤다.
꽃에서 꽃으로 갈지(之)자를 그리며 팔랑대며 천(川)을 건너는 나비 아래 물 소리가 들리지 않나. ‘나비 날개짓’이라는 일루젼을 정지된 평면 회화 매체에 가두어 놓으면 화폭 공간에서 선 라인과 면 그리드가 여전히 주인공이다. 꽃잎에 앉을 수 없는, 자동 회전문과 같은 무한 루프에 빠져드는 나비떼들은 자연과 유리된 현대인, 관객 자신이다.
영국 현대 미술 전성기를 이끈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1965~)의 나비 상징은 삶의 덧없음과 헛됨을 전하는 17세기 네덜란드(플랑드르)에서 유행한 정물화 장르 바니타스(Vanitas)를 떠올리게 한다.
나비를 매개로 시간과 공간이 상호 교차하면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작가의 자각은 화엄경에 나오는 ‘인다라망(因陀羅網)’을 상기시킨다. 인다라망은 산스크리트어로 인드라얄라(indrjala)이며 인드라의 그물이라는 뜻이다.
작가의 원(圓·circle) 시리즈인 부조의 볼룸을 극대화한 작품들은 건축물 외부 선컨 가든 바닥에 놓인 페이빙 패턴(벽돌 구조)처럼 내부와 외부가 연결되고 순환된다는 인다라망 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정현숙 작품들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1899~1986)의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 비유할 수도 있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우주'로 보며, 우주는 시스템이라고 본다. 도서관이 무한하며 또 동시에 유한하기에, 주기성을 갖는다. 우주는 직선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닌 순환적이라고 본다.
작가는 유학 시절부터 ‘동서문화를 아우르는 게 무엇일까’를 오랫동안 고심하였기에 자개를 자르고 붙이고, 패턴을 구성하고 물감을 입히는 작업을 하며 동서간 상이한 가치의 전이, 수용, 확산, 통합, 접목, 해체 등 다원적이고 복합·근원적인 문화 접맥을 무던히도 시도했다.
2013년 개인전 ‘무한 환영(Infinity Illusion)’ 이후 관객들은 쿠사마 야요이의 ‘무한 망(Infinity Net)’ 시리즈를 연상하기도 한다.
한때 추상 작업만 하였던 작가는 지금은 대상을, 기능적이고 구조적인 패턴을 드러내면서 매스(mass)를 제거한 단순 기하학적인 골격에 크리스탈이나 스와로브스키를 붙여 질감을 낸다.
정현숙 작품은 구조화된 화면 구성과 디테일 또한 특징이다. 도상 이미지는 두드러진 격자(格子), 즉 그리드(grid)와 다양한 원색과 조합이 된다. 서양미술의 원형과 한국성이 중첩되어(layers) 충돌한다.
한편으로는 엄격한 구성에 의한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하는 옵 아트와 디테일 표현이 장점인 에칭 판화와 결합한 형식으로 보일 수도 있다. 착시(optical illusion·눈속임) 목적의 트릭 아트와는 다르다. 작가는 ‘~~다’라고 느끼는 감정을 ‘일루젼’(illusion)이라고 규정한다.
정현숙 개인전 <인피니티 일루젼·Infinity Illusion>은 경기 용인시 수지구 갤러리위에서 12월 7일까지이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60여편,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00여편, 2019년 10월 ~2023년 4월 매일경제신문에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