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빠진 라흐마니노프 vs 발레음악을 만난 프로코피예프
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22 격변기의 러시아 낭만주의자들 라흐마니노프 & 프로코피예프(3)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더불어 20세기를 변혁시킨 최대 사건이다. 1차대전의 종식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러시아 사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이 등장하면서 2차대전이 일어났고, 이후 미소 경쟁의 냉전 체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예술 역시 ‘러시아 혁명’이라 부를 만한 변혁의 물결이 밀려왔다. 발레 뤼스(Ballet Russes)가 1909년부터 20년간 활동하며 문화예술계를 뒤집어놓았기 때문이다. 발레 뤼스는 러시아 미술, 음악, 발레를 서구에 소개했고 미하일 포킨,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등 예술가들도 들어왔다. 문학의 장 콕토, 미술의 파블로 피카소, 패션의 코코 샤넬 등 당대의 대단한 인물들도 발레 뤼스에 참여했다.
이런 충격적 변화는 이번 프레너미 커플과 같은 세르게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다른 남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y Diaghilev·1872~1929)에 의해 출현했다. 재능 있는 예술가는 아니었지만 재능을 알아채는 데는 비범했던 그는 자신의 취향과 스타일로 발레 뤼스를 만들어 모든 예술계를 뒤흔들었다.
발레 뤼스의 영향은 음악은 물론 연극, 발레, 미술, 무대미술, 패션 등 어디 하나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고, 그 영향으로 서유럽 문화계는 모더니즘을 대폭 수용하게 된다. 그의 대표작중 하나는 1914년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하고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안무한 <봄의 제전>이다. 동성애자였던 그가 이끌었던 발레 뤼스는 현대 게이 문화의 요람이었으며, 동성애는 자신의 삶과 발레 뤼스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니진스키부터 마신, 리파로 이어진 발레단의 남자 스타와의 동성애는 스캔들을 일으키며 서유럽 예술계에서 더욱 화제를 몰아왔다. 하지만 이 신화적 흥행사의 악명 높은 유혹의 능력 때문에 연구자들에게도 그의 진면목이 가려지기도 했다.
디아길레프는 발레 뤼스를 통해 아르 누보(Art Nouveau) 스타일과 엑조티시즘(exoticism·이국적인 것을 선호하는 취향)에 젖어있던 유럽의 예술계를 모더니즘의 세상으로 이끌었다. 특히 창조적이고 선구적인 것을 갈망하며 유행을 선도하던 예술가들에게 발레 뤼스를 통해 디아길레프가 보여준 것들은 경이와 신비, 매혹과 유혹으로 다가왔다.
우리의 첫 번째 세르게이인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과 연주에 전념하느라 세 번째 세르게이와의 인연을 충분히 맺지 못했지만, 두 번째 세르게이인 프로코피예프는 세 번째 세르게이와의 인연을 통해 서유럽으로 연결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교향곡의 실패로 우울증에 빠진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1873~1943)는 1892년 9월 모스크바 전기 박람회의 콘서트에서 크게 성공하며 젊은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1893년 라흐마니노프는 하르키우 주에서 여름을 보내며 ‘환상모음곡’(antaisie-Tableaux 일명 모음곡 1번 Op. 5), ‘거실의 조각들’(Morceaux de salon, Op. 10)을 포함한 여러 곡을 작곡했다. 그러던 중 그는 다가올 유럽 투어에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를 지휘하기로 한 차이코프스키가 콜레라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키이우에서 오페라 <알레코>의 공연을 지휘하다 접했다. 충격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비탄의 3중주’(Trio élégiaque No. 2)를 한 달만에 완성해 자신의 우상의 죽음에 대한 슬픔의 깊이와 진심을 표현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코프스키의 죽음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상심한 그는 작곡할 영감이 부족했고, 대극장 경영진은 <알레코>의 공연에 관심이 식어지며 프로그램에서 제외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없이 선택한 피아노 레슨을 몹시 싫어했다. 그 와중에 순회가 시작되기 직전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Op. 13)을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1월에 구상한 것으로 러시아 정교회 예배에서 들은 성가를 바탕으로 했다.
1895년 후반에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테레지나 투아(Teresina Tua)가 제안한 3개월간의 러시아 전역 순회공연을 떠났지만, 흥미가 없어진 라흐마니노프는 계약을 깨고 중도에 그만 뒀다. 그 바람에 돈도 받지 못했다. 게다가 기차여행중 맡아두었던 거액의 돈을 도난당하는 사고까지 벌어졌다. 절박해진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원을 졸업하며 스승 즈베레프로부터 받은 금시계를 전당포에 맡겼다. 그리고 손실을 메우기 위해 작곡에 열심을 부어넣어 ‘여섯 개의 합창’(Six Choruses Op. 15)과 ‘여섯 개의 악흥의 순간’(Six moments musicaux Op. 16)을 완성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운명은 점점 그를 바닥으로 안내했다. 1897년 3월 28일 러시아 교향곡 콘서트 시리즈에서 그의 교향곡 1번이 초연된 후 러시아 국민음악 5인조인 세사르 쿠이(Cesare Cui)는 이 작품을 이집트의 7대 재앙에 비유하는 최악의 평가를 내렸다. 후일 라흐마니노프의 절친한 친구인 알렉산드르 오소프스키(Alexandr Ossovsky)는 회고록에서 지휘자 글라주노프(Glazounov)가 두 개의 다른 초연곡이 포함된 프로그램을 "리허설조차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고 했다. 심지어 라흐마니노프의 아내를 포함한 다른 목격자들은 알코올 중독자였던 글라주노프가 취했을 수 있다고 증언했다.
라흐마니노프 역시 "내 교향곡이 첫 번째 리허설 후에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에 깊은 괴로움과 심한 우울증을 느꼈다"고 기록을 남겼다. 연주가 형편없던 것에는 글라주노프의 기여가 분명 있었다고 아쉬워했던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 연주되지 않았지만 1898년에 교향곡 1번을 4손을 위한 피아노 편곡으로 개정했다.
라흐마니노프는 3년간 우울증에 빠졌고, 영감의 고갈에 시달려 거의 아무것도 작곡하지 못했다. 그는 이 시기를 "뇌졸중을 앓아 오랫동안 머리와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사람과 같다"고 회고했다. 이 기간 피아노 레슨이 그의 생계수단이었다.
러시아 산업가이자 모스크바 사립 러시아 오페라극장의 설립자인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가 침체에 빠져 있던 그를 구했다. 그는 라흐마니노프에게 1897~1898년 시즌의 부지휘자 자리를 제안했고, 경제적으로 쪼달리던 작곡가는 바로 수락해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의 <삼손과 델릴라>(Samson and Delilah) 공연에서 오페라 지휘 데뷔를 했다. 한숨 돌린 라흐마니노프는 1899년 2월 말까지 짧은 피아노곡 두 개, 환상곡 소품과 F장조 푸게타를 완성했다. 2개월 후 그는 처음 런던을 방문해 지휘를 했고, 긍정적인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잠시의 호전도 그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1899년 후반에 그의 우울증은 여름 이후 더 악화되었고, 런던으로의 재방문을 위한 작곡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처지를 답답하게 여긴 그의 이모는 작곡에 대한 그의 열망을 되살리기 위해 라흐마니노프가 크게 존경했던 작가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에게 집으로 방문해주기를 간절히 부탁했다. 그러나 대문호 톨스토이의 격려로도 그의 우울증은 낫지 않았고, 작곡은 여전히 저조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의 문제는 예술로부터가 아니라 전문적 정신의학으로부터 도움을 받고서야 호전되었다. 그 결과 그는 극적인 반전을 이루고 이전보다 더 성공적인 컴백을 이루게 된다. 길고 긴 고통의 세월 뒤에 찾아온 기쁨이었다.
디아길레프와 발레의 세계를 만난 프로코피예프
세르게이 프로코프예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1891~1953)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혁신적 음악을 지지하던 애호가 그룹이 후원한 콘서트 시리즈인 ‘현대음악 저녁음악회(Evenings of Contemporary Music)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음악원 재학중인 학생이었지만 1911년부터 모스크바 여름 교향곡 시즌에 참석하며 프로코피예프는 현대음악으로의 과도기 사이에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910년 프로코피예프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재정 지원도 중단되었다. 다행히 그는 이미 음악원 밖에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상태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현대음악 저녁 콘서트에 출연하면서 프로코피예프는 색채적이고 불협화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연습곡‘(Etude) Op. 2(1909년작)와 같은 모험적인 피아노 작품 중 몇 가지를 선보였다. 그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저녁 콘서트 주최자들은 프로코피예프를 초대하여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의 ’3개의 피아노 소품‘(Drei Klavierstücke, Op. 11)의 러시아 초연을 하게 했다. 프로코피예프의 화성적 실험은 다조성을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피아노를 위한 풍자‘(Sarcasms for piano, Op. 17·1912년작)로 이어졌다.
이 무렵 프로코피예프는 처음으로 피아노 협주곡을 두 곡 작곡했는데, 그 중 2번 협주곡은 초연(1913년 8월 파블로프스크)에서 스캔들을 일으켰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어떤 청중이 "'미래지향적인 음악은 지옥에 가라! 지붕 위의 고양이들이 더 좋은 음악을 만들고 말지!'"라고 소리치며 객석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들은 강렬한 불협화음에 열광했다. 학생이었지만 이미 기성 음악인의 지위를 획득한 프로코피예프는 졸업을 목전에 둔 1914년 '피아노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음악원 학생으로서의 경력을 마감했다. 피아노 전공생 중 가장 뛰어난 5명을 선발하여 슈뢰더 그랜드 피아노를 상품으로 제공하는 이 대회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직접 연주하여 당연한 우승을 거두었다.
1911년 선배 세르게이인 라흐마니노프의 친구였던 유명한 러시아 음악학자이자 비평가인 알렉산드르 오소프스키(Alexandr Ossovsky)는 음악출판사 설립자인 페테르 유르겐손의 대를 이은 아들 보리스(Boris P. Jurgenson)에게 유망한 젊은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를 놓치지 말라고 편지를 썼다. 추천이 고마웠던 프로코피예프는 결국 유르겐손과 계약을 했다.
1913년 프로코피예프는 첫 외국 여행을 파리와 런던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또다른 세르게이인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 조우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이듬해 그는 다시 런던으로 여행을 떠나 디아길레프와 접촉했고, 자신의 첫 발레인 <알라와 롤리>(Ala and Lolli)의 음악을 의뢰받았다. 다시 해가 바뀐 1915년 이탈리아에서 진행 중인 작품을 디아길레프에게 가져왔지만, "비러시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프로코피예프에게 "민족적 성격의 음악"을 쓰라고 촉구한 디아길레프는 다시 발레 <광대>(Chout)를 의뢰했다. 이 작품의 원작은 "다른 일곱 광대를 속이는 광대의 이야기"라는 러시아 민담이었다. 광대와 일련의 속임수에 관한 이 이야기는 이전에 이미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가 디아길레프에게 발레 작품으로 제안했던 것이었다.
디아길레프의 조언 하에 프로코피예프는 민족학자 알렉산드르 아파나셰프(Alexander Afanasyev)의 민화 모음 중에서 주제를 선택해 작곡에 들어갔다. 디아길레프와 그의 안무가 레오니드 마신(Léonide Massine)은 프로코피예프가 제대로 된 발레 대본에 따른 적합한 발레음악이 되도록 도왔다. 그러나 발레에 대한 경험 부족으로 인해 프로코피예프는 초연 전에 디아길레프의 자세한 비판을 들어야 했고, 결국 1920년대에 작품을 광범위하게 수정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입문한 발레음악은 프로코피예프가 평생 애정하는 장르가 됐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