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의 화신 라흐마니노프 vs 혁신의 추구 프로코피예프
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 22 격변기 러시아 낭만주의자들 '라흐마니노프 & 프로코피예프' (2)
러시아 문화와 예술은 넓은 의미로 살펴보면 오랜 역사 속에서 러시아인이 이루어 놓은 모든 정신적·물질적 성과물을 총칭한다. 러시아의 지리적 환경, 역사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의식주 문화나 문학, 러시아인의 의식 구조와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 차례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문화의 대대적 수입이 이루어지며 급격한 서구화로 접어들고, 나폴레옹의 원정 실패 이후 자본주의의 유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구화의 이면에는 러시아 본래의 것, 슬라브적인 바탕이 파괴되는 반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국민음악 5인조는 바로 이러한 각성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유럽의 문화는 단지 수입만 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전통과 만나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되었고 새로운 컨텐츠를 입었다. 그리고 20세기 초가 되면 다시 서유럽으로 진출하고 미국까지 건너가 러시아 정신의 광대함을 알리게 된다. 모더니즘의 씨앗을 프랑스가 심었다면 모더니즘을 꽃피운 것은 러시아 출신의 예술가들이라는 평가도 낯설지 않다. 백야의 여름이 지나면 길고긴 밤이 끝없이 이어지는 러시아의 환경이 깊고 진지한 예술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며, 제국 치하와 혁명기 고단함을 문화예술로 달래는 것 또한 문화의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러시아 문학은 푸쉬킨으로 시작해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홉, 고골, 고리키에서 파스테르나크로 이어지며 20세기로의 전환을 이룩했다. 러시아 미술은 레비탄(Levitan)에서 시작해 말레비치(Malevitch)를 지나면 익히 알고있는 칸딘스키(Kandinsky)와 샤갈(Chagall)로 절정을 이룬다. 프랑스에서 수입된 발레는 아직까지도 러시아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장르다. 심지어 영화에 있어서도 에이젠쉬타인(Eisenstein) 감독이 끼친 영향은 막강하다.
발레 못지 않게 음악도 영향이 커서 차이코프스키 이후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스트라빈스키, 스크리아빈, 쇼스타코비치 등의 작곡가들이 쏟아져나와 20세기 클래식 음악계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연주의 세계는 더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 등 주류 악기 분야에서 러시아 출신 연주자들은 엄청난 이름들로 가득하다. 20세기 초중반 러시아 출신들을 빼고는 유럽의 문화예술을 논할 수 없을 지경이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 음악원을 졸업한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 1873~1943)는 12살에 어머니의 조카이자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알렉산더 실로티(Alexander Siloti·1863~1945)의 주선으로 1885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들어갔다. 실로티의 스승이자 엄격한 선생으로 소문난 니콜라이 즈베레프(Nikolai Zverev 1832~1893)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3년간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라흐마니노프는 즈베레프의 집에 4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같은 학생인 알렉산드르 스크랴빈(Alexandr Scriabin)과 친구가 되었다. 2년간의 수업 후 15세의 라흐마니노프는 루빈슈타인 장학금을 받으며 음악원의 학위 과정을 졸업했다. 피아노에서는 실로티의 제자가 되었고, 대위법에서는 세르게이 타네예프(Sergei Taneyev)의 제자가 되었고, 작곡법에서는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의 제자가 되었다.
1889년 라흐마니노프는 즈베레프의 집을 나와 모스크바에 있는 삼촌과 숙모인 사틴과 함께 살게 되었다. 작곡을 위해 별도의 피아노 임대와 더 큰 사생활을 제공해 달라는 라흐마니노프의 요청에 스승 즈베레프는 화가 나서 얼마 동안 라흐마니노프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즈베레프는 재능 많은 라흐마니노프에게 작곡은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웃집에 사는 스칼론(Skalon) 가문의 막내딸 베라(Vera)와 첫 연애를 했지만, 베라의 어머니는 라흐마니노프가 어린 딸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을 금지했다.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그녀의 언니 나탈리아(Natalia)와의 서신만 허락받았는데, 이 편지들에서 라흐마니노프의 초기 작품 중 많은 부분이 나타난다.
라흐마니노프는 1890년 여름 방학을 사틴(Satin) 부부의 개인 별장인 이바노프카(Ivanovka)에서 보낸 후 1917년까지 여러 번 방문했다. 그가 작곡한 작품 중에는 1891년 7월에 완성하여 실로티에게 헌정한 작품 1, 피아노 협주곡 1번은 평화롭고 목가적인 주변 환경이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 해에 라흐마니노프는 1악장으로 구성된 ‘청춘 교향곡’(Youth Symphony)과 교향시 ‘로스티슬라프 대공’(Prince Rostislav)을 완성했다.
1891년 학년이 끝난 후 실로티가 모스크바 음악원을 떠나게 되자 라흐마니노프는 다른 선생님이 배정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1년 일찍 피아노 최종시험을 치르겠다고 요청했다. 음악원장인 바실리 사포노프(Vasily Safonov)가 3주의 준비 기간을 주자 라흐마니노프는 시험에 익숙한 선배 졸업생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아 1891년 7월에 모든 시험에서 우등으로 합격했다. 3일 후, 그는 이론 및 작곡 시험도 무난히 통과했다. 그러나 1891년 후반에 이바노프카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는 동안 라흐마니노프는 심각한 말라리아에 걸려 작곡을 일시적으로 중단해야 했다.
음악원 졸업연도에 라흐마니노프는 첫 독립 콘서트를 열었고, 1892년 3월에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첫 악장을 연주했다. 졸업작품으로는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서사시인 ‘집시’(Tsygany)를 기반으로 한 단막 오페라인 <알레코>(Aleko)를 천재답게 단 17일 만에 완성했다.
사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오페라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성공적이었다. 1892년 5월 볼쇼이 극장 초연에서 차이코프스키는 젊은 청년 라흐마니노프의 작품을 칭찬했다. <알레코>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수석 졸업과 작곡가 금메달을 동시에 안겨주었는데, 이 영예는 이전에 단 둘에게만 수여되었던 것이었다. 시험위원이었던 즈베레프는 라흐마니노프에게 금시계를 선사하며 그동안의 소원함을 풀었다. 볼쇼이극장은 <알레코>를 계기로, 향후 평생 친구가 된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Feodor Chaliapin)을 주연으로 하는 오페라를 제작하기로 했다.
졸업 후 라흐마니노프는 작곡을 계속했고 구테일(Gutheil) 음악출판사와의 500루블의 출판 계약에 따라 <알레코>와 ‘2개의 소품’(Two Pieces Op. 2)과 ‘6개의 노래’(Six Songs Op. 4)를 최초로 출판했다. 피아노 레슨으로 한 달에 15루블을 벌던 라흐마니노프에게는 적잖은 금액이었다. 1892년 여름을 코스트로마(Kostroma)주에 있는 부유한 지주 코나발로프(Konavalov)가의 영지에서 보낸 라흐마니노프는 아르바트(Arbat) 지구에 있는 사틴 가로 다시 이사했다.
구테일의 급여 지급이 늦어지자 라흐마니노프는 다른 수입원을 찾게 되었고, 그 결과 1892년 9월 모스크바 전기 박람회의 부속 행사 콘서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피아니스트로서 공식 데뷔를 한 그는 5부작 피아노 작품 ‘환상의 조각들’(Morceaux de fantaisie Op. 3)에서 획기적인 C#단조의 전주곡을 초연했다. 이후 이 작품은 가장 인기를 지속한 그의 작품 중 하나가 되었는데, 출연료는 50루블이나 되었다. 이듬해인 1893년 라흐마니노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Rimsky-Korsakov)에게 바친 본격적인 교향시 ‘바위’를 완성하는 등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서의 행보를 계속했다.
낭만에서 현대로의 과도기 음악가로 성장한 프로코피예프
세르게이 프로코프예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1891~1953)는 13살이던 1904년 글라주노프(Glazunov)의 권유에 따라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가 1914년까지 다니며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서의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
음악원에서 대부분의 급우들보다 몇 살 어린 프로코피예프는 괴짜스럽고 거만하다고 여겨졌지만, 뛰어난 음악성은 더 나이먹은 동급생들을 뛰어넘었다. 반 친구들의 실수에 대한 통계를 작성해 그들을 짜증나게 한 적도 있었으며, 그들의 수준에 맞춘 교수들의 가르침을 종종 지루하다고 느껴 불만을 토로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작곡가 보리스 아사피예프(Boris Asafyev)와 니콜라이 먀스코프스키(Nikolai Myaskovsky)와 함께 수업을 들었고, 후자와는 평생 친구가 되었다.
음악원 재학 기간 동안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는 알렉산더 윙클러(Alexander Winkler)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은 아나톨리 랴도프(Anatoly Lyadov)에게, 지휘법은 니콜라이 체레프닌(Nikolai Tcherepnin)에게 배웠고 관현악법은 위대한 림스키-코르사코프로부터 지도받는 기회를 누렸다. 하지만 림스키-코르사코프가 1908년에 사망했을 때 의외로 프로코피예프는 ‘어떤 식으로든 그와 함께 공부했을 뿐'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수업반에서 많은 학생 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와 함께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계에서 소년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적 반항아로 명성을 얻었지만, 그와 동시에 직접 피아노로 연주한 자신의 오리지널 작품으로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런 양면성 때문인지 신동으로 소문났던 프로코피예프는 1909년에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성적으로 작곡과 하위과정을 졸업했다. 그는 음악원에서 계속 공부하여 안나 예시포바(Anna Yesipova)의 지도를 받으며 피아노를 공부했고 체레프닌의 지도 아래 지휘 수업을 계속 받았다.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에서 보낸 1904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동안 창작활동에 더 빼어난 진전을 보였다. 음악원은 프로코피예프에게 음악의 학문적 기초에 대한 확고한 기초를 제공했지만, 그는 음악적 혁신을 열렬히 추구했다. 그의 열정은 새로운 음악적 쇄신을 추구하고 그런 시도를 옹호하는 진보적인 서클의 지원을 받았다. 교수들 중에 그의 괴짜스러움과 저항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다들 그의 독창성 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졸업 연주회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자신의 첫 번째 대규모 작품인 D플랫 장조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훌륭하게 연주하여 피아노 부문에서 안톤 루빈슈타인 상(Anton Rubinstein)을 수상했다.
피아니스트로서 프로코피예프의 첫 공식연주회 출연은 1908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혁신적 음악을 지지하던 애호가 그룹이 후원한 콘서트 시리즈인 ‘현대음악 저녁음악회(Evenings of Contemporary Music)였다. 그의 직접적인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없었던 애호가 그룹의 도움으로 작곡가로서 첫 출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지원으로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 재학중인 1911년과 1912년에 모스크바 여름 교향곡 시즌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서 프로코피예르는 낭만파와 현대음악의 과도기 사이에 중요한 음악가로 차근차근 성장하고 있었다. /뉴스버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