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패션'이 뜬다…'동물 깃털' 없는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
[고재학의 경제이슈 분석] 유명 브랜드들, 입는 채식주의 ‘비건 패션’에 속속 합류 6년 만의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 천사의 날개서 '동물 깃털' 추방 비건에 열광하는 MZ, 가성비 못지않게 가심비(價心比) 중시
미국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이 매년 열었던 화려한 속옷 패션쇼가 돌아왔다. 2018년 11월 뉴욕 패션쇼를 끝으로 문을 닫은 지 6년 만이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최근 패션쇼 재개를 알리면서 “앞으로 ‘천사의 날개’에 동물 깃털 대신 인조 깃털을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15일 뉴욕에서 열린 패션쇼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한 블랙핑크 리사와 남아공 가수 타일라는 인조 깃털로 만든 천사의 날개를 달고 축하 공연을 펼쳤다.
화려한 깃털 날개로 장식된 옷(천사의 날개)을 입은 모델들이 등장하는 게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의 특징이다. 그간 패션쇼 한번 열 때마다 타조, 꿩, 닭 등에서 뽑아낸 깃털 62만개가 쓰였는데, 앞으로는 동물 학대 안하고 인조 깃털만 쓰기로 한 것이다.
◇ 동물도 고통 없이 살아갈 권리가 있다
‘비건(vegan)’ 하면 흔히 채식주의자를 떠올리지만, 비건이 먹는 취향만 가리키는 건 아니다. ‘비건’이라는 말은 세계 최초의 비건 단체인 영국 ‘비건소사이어티’가 만들었다. 이 단체는 비건을 ‘동물과 모든 동물 부산물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비건은 고기 소시지 계란 우유 등을 먹지 않고, 가죽 모피 깃털 같은 동물 소재를 사용한 옷이나 가방을 이용하지 않는다. 동물 원료로 만들거나 동물을 대상으로 테스트한 화장품을 쓰지 않고, 동물원과 돌고래쇼와 같이 동물을 이용한 엔터테인먼트도 거부한다.
비건은 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고통과 감정을 느끼는 존재이며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옷이나 가방을 만드는 과정에서 살아 있는 동물의 털을 뽑거나 산 채로 가죽을 벗겨내는 동물 학대를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다. 고기나 유제품을 먹지 않는 채식주의는 흔히 접할 수 있지만, ‘비건 패션’은 아직 대중화 단계로 접어들지 못했다.
◇ 구찌, 아르마니, 발렌티노 등 명품 브랜드 비건 대열에 합류
동물 학대에 대한 비판 의식이 높아지면서 여러 유명 브랜드가 비건 대열에 합류했다. 구찌와 아르마니는 생산제품 전라인에서 모피 사용을 중단했다. 영국은 2000년 세계 최초로 모피 생산을 위한 동물 사육을 금지했고, 오스트리아 덴마크 체코 노르웨이 등도 여기에 합류했다.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발렌티노’는 2020년 알파카 울(wool)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알파카는 남미 안데스산맥 등 고산지대에서 모직 원단을 만들기 위해 키우는 낙타과 포유류이다. 페루 알파카 농장의 동물 학대가 논란이 되자 발렌티노가 명품 브랜드 가운데 처음으로 울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주목 받은 비건 패션
유명 패션 브랜드들이 비건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이 컸다. 세계 최대 밍크 모피 생산국인 덴마크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밍크 1,700만 마리를 살처분했다. 철창 안에 갇혀 있던 밍크들이 가스실로 던져졌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죽어가는 영상이 공개돼 전 세계인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모피 코트 한 벌 만드는 데 밍크 50~200마리, 여우는 11~45마리, 토끼 품종인 친칠라는 50~100마리가 필요하다. 털 때문에 희생되는 동물은 매년 10억 마리로 추정된다.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잔혹하게 도살된다.
다운(down∙솜같이 부드러운 털) 채취 방식도 끔찍하다. 살아있는 거위와 오리의 다리를 묶고 마취 없이 강제로 털을 뽑는다. 털이 세게 뽑히면 피부가 찢어져 출혈로 죽거나 심한 고통 탓에 쇼크로 죽기도 한다. 털 뽑기는 생후 10주 때 시작돼 6주마다 반복된다. 이런 고통을 진통제 없이 죽을 때까지 견뎌야 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꺼내 입는 거위털 패딩, 오리털 패딩이 대표적인 다운 제품이다.
◇ 깃털∙솜털 수집에 매년 조류 15억 마리 도살…‘새 깃털 사용 않기’ 캠페인
유럽 의류 업계 내부에선 ‘새의 깃털을 사용하지 말자’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의류 산업에 희생되는 조류는 거위와 오리 외에도 타조, 칠면조, 공작, 꿩, 닭 등 다양하다. 타조만 해도 매년 100만 마리가 깃털 수집 탓에 희생되고 있다.
영국의 유명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는 최근 국제동물권단체 페타(PETA)와 함께 동물의 깃털 사용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의류 업체들을 대상으로 “앞으로 새의 깃털을 쓰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는 한편, 갈대가 원료인 ‘바이오퍼프’라는 소재를 대체재로 쓸 계획이라고 한다. 매카트니는 “옷을 만들 때 필요한 아름다운 깃털이나 부드러운 솜털 때문에 희생되는 조류가 해마다 15억 마리나 된다”고 강조했다.
◇ 동물 가죽→ 식물성 가죽, 구스다운(goose down)→ 죽은 동물의 털
동물 가죽이나 솜털, 깃털을 대체하는 식물성 소재 개발도 활발하다. 지난해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한 김건희 여사가 사과 껍질 가죽으로 만든 비건 핸드백을 들어 주목을 받았다. 사과잼, 사과주스 등을 만들고 난 후 버려지는 사과 껍질의 섬유질에서 추출한 펄프를 직조화해 만든 친환경 비건 가죽이다.
파인애플 껍데기를 이용한 식물성 가죽 ‘피나텍스’는 의류뿐만 아니라 전기차 ‘테슬라’에 들어갈 정도로 판로를 넓히고 있다. 코르크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코르크 가죽, 버섯 가죽 등 식물의 섬유질을 활용해 만든 ‘비건 가죽’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미국의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는 살아있는 거위나 오리 털을 뽑는 대신, 식용 닭과 거위가 죽고 난 다음 털을 뽑아 다운 패딩을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 ‘새들의 지저귐이 사라진 숲’을 꿈꾸시나요?
식물성 가죽은 탄소배출이 적고 버렸을 때도 생분해돼 친환경적이다. 단점은 대중화하기엔 가격이 비싼 편이다. 비건 가죽 제품에 가장 열렬히 호응하는 이들은 MZ세대다. 가성비도 따지지만 가심비(價心比), 이른바 가치 지향적인 소비에도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비건 가죽 시장은 매년 7.5%씩 성장하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사람과 동물, 자연환경이 모두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줬다. 인간이 자연을 마구 훼손하고 동물 서식지를 파괴함으로써 코로나19와 같은 동물 매개 감염병에 대한 노출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동물을 보호하고 환경을 보존함으로써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고재학은 한국일보에서 33년간 기자로 일하며 경제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올해 6월 뉴스버스 공동대표로 합류해 경제 부문을 맡고 있다. 뉴스버스TV에서 주요 경제 이슈를 정리해주는 ‘고재학의 경제버스’를 진행한다. 스테디셀러 <부모라면 유대인처럼>을 비롯해 <절벽사회> <휴대폰에 빠진 내 아이 구하기> 등의 책을 썼다. 우직하게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힘을 믿는 언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