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낳은 음악신동들 라흐마니노프 vs 프로코피예프

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22 격변기의 러시아 낭만주의자들 '라흐마니노프 & 프로코피예프' (1)

2024-10-13     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러시아는 9세기 노브고로드 공국 성립 후 19세기까지 1천년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유럽의 변방 취급을 받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동방의 시베리아까지 영토는 확장되었지만 얼어붙은 동토는 쓸모가 없었고, 러시아는 늘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을 찾아 동쪽으로 서남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제국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들은 문화적으로도 무시당하지 않는 수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 시절 문화의 정수가 모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전경.


슬라브 민족의 나라가 슬라브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 이유는 노예(slave)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이름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셀주크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 시대에 해적과 도적 무리들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러시아 지역에 출몰하며 주민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았고, 특히 금발의 백인 여자노예들은 투르크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까지 비싼 값에 팔렸다고 한다. 오늘날의 이름은 옛 동슬라브인들이 사는 땅의 이름이었던 그리스어 루스(Русь·Rus)를 가리키는 현지발음 로씨야(Ῥωσσία / Rhōssía)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17세기 후반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 러시아의 유럽화는 힘을 받았고, 유럽 선진국들의 제도와 법률, 행정체계도 도입됐다. 유럽의 문학과 연극, 음악도 자연히 따라들어왔다.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음악과 미술도 전통을 형성해 나름대로의 발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세련된 서양문물은 러시아의 황실과 귀족들을 사로잡았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의 원정을 현명하게 별 피해 없이 막아낸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문학과 음악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한다. 문학에서는 푸쉬킨으로부터 시작해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체홉에 이르는 당대의 펜들을 생산해냈고, 음악에서는 국민음악 5인조로부터 시작해 차이코프스키와 최후의 낭만주의자들을 배출했다. 

가장 먼저 러시아가 수출국으로 인정받은 것은 발레였다. 20세기 초반 정체돼 있던 서유럽 무용계에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가 이끄는 발레 뤼스(Ballet Russes)의 출현은 충격적이었다. 그를 통해 서방으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의 프랑스인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의 작품들이 알려지면서 20세기는 러시아에서 시작된 작품들이 발레극장을 휩쓸었다. 발레 뤼스는 무용뿐 아니라 음악과 미술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치며 러시아 예술의 서방 진격에 큰 역할을 했다.

러시아 문화예술의 유럽 진출, 나아가 세계에 우뚝 선 굴기는 천재들의 출현과 더불어 러시아 혁명과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가져다준 연쇄반응이었다. 그 전면에 있었던 선후배들로 세르게이라는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라흐마니노프와 프로코피예프가 이번 스물 두 번째 프레너미 시리즈의 주인공들이다.

러시아 정교회 음악 속에 자란 천재 라흐마니노프

어릴 적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1873~1943)는 러시아 제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가문의 전통에 따르면, 몰다비아(Moldavia) 왕 스테판 3세의 손자로 추정되는 일명 '라흐만'이라 불린 바실리(Vasily)의 후손이라고 한다. 라흐마니노프 가문은 대대로 군인 집안이었지만, 할아버지인 아르카디 알렉산드로비치(Arkady Alexandrovich)가 야상곡의 창시자인 아일랜드 작곡가 존 필드(John Field)로부터 수업을 받은 음악가일 만큼 음악과 관계가 깊었다. 아버지 바실리 아르카디예비치(Vasily Arkadievich·1841~1916)는 은퇴한 육군 장교이자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로 장군의 딸인 류보프 페트로브나 부타코바(Lyubov Petrovna Butakova·1853~1929)와 결혼했는데, 어머니는 지참금의 일부로 5개의 영지를 가져왔다. 부부는 블라디미르, 세르게이, 아르카디라는 세 아들과 옐레나, 소피아, 바르바라라는 세 딸을 낳았다.  

세르게이는 러시아 북서부 노브고로드 주 세묘노보(Semyonovo) 마을에 있는 가족 영지에서 태어났고, 그가 4살 때 북쪽에 위치한 오네그 영지의 다른 집으로 이사해 9살까지 거기서 자랐다. 이 곳으로 이사한 해에 세르게이는 어머니의 뜻으로 피아노와 음악 레슨을 시작했는데, 그녀는 아이가 한번 들으면 틀린 음표 없이 재현해내는 능력을 곧 알아챘다. 소년의 재능에 대한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 아르카디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을 갓 졸업한 안나 오르나츠카야(Anna Ornatskaya)를 가정교사로 들여 정식으로 음악을 가르치도록 했다. 세르게이는 후에 ‘12개의 로망스’(12 Romances, Op. 14) 중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그의 유명한 로망스 '봄의 시냇물(Spring Waters)'을 오르나츠카야에게 헌정했다.

아버지 바실리는 재정적 능력이 없어 빚을 갚기 위해 5개의 영지를 하나하나 팔아야 했고 1882년 가족은 영지를 떠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듬해 오르나츠카야는 당시 10살이 채 안되었던 세르게이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도록 주선했다. 그해 말, 그의 누나 소피아가 13살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고, 아버지는 가족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외할머니인 ​​소피아 리트비코바(Sofia Litvikova)가 아이들 양육을 도우러 와서 가계를 관리했는데, 세르게이를 정기적으로 러시아 정교회 예배에 데려갔다. 거시서 세르게이는 처음으로 전례 성가와 교회 종소리를 접하게 되었고 이 두 가지 특징은 후에 그의 음악에 통합되었다.

1885년 세르게이에게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소개해 주는 등 중요한 음악적 영향을 끼친 5살 위 누나 옐레나가 악성 빈혈로 사망하면서 한 번 더 정신적 상실을 겪었다. 이 후유증으로 세르게이는 음악원에서 무단 결석을 하고 일반 교양 과목에서 낙제했으며 학업에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이 기간 동안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공연했는데, 여기에는 황제의 동생인 콘스탄틴(Konstantin) 대공과 다른 유명 인사들도 참석했다. 

13살이 된 1886년 봄학기 시험에 낙제하자 오르나츠카야는 전문 과정에 대한 입학이 취소될 수 있다고 통보했다. 걱정이 커진 어머니는 조카이자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알렉산더 실로티(Alexander Siloti·1863~1945)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라흐마니노프를 모스크바 음악원으로 옮겨 더욱 엄격한 그의 전임 스승 니콜라이 즈베레프(Nikolai Zverev·1832~1893)에게 배우도록 주선했다. 세르게이는 15살 되는 1888년까지 이 수업을 지속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렇게 음악원 초반에는 주목받는 학생이 아니었다.

9살에 오페라를 작곡한 신동 프로코피예프 

신동 시절 프로코피예프.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프예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1891~1953)는 같은 세르게이라는 이름을 가진 라흐마니노프보다 18년 뒤인 1891년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주 바흐무트 우에즈드 지역 손초프카(Sontsovka)의 시골 영지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은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Donetsk Oblast) 포크롭스크 지방 손치프카이다. 아버지 세르게이 알렉세예비치(Sergei Alekseyevich·1846~1910)는 모스크바의 상인 가문 출신의 농학자였고, 어머니 마리아(Maria  Zhitkova·1855~1924)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셰레메테프 가문의 후원을 받던 민속예술가문 출신으로 잘 훈련된 피아니스트였다. 프로코피예프의 첫 작곡 교사인 라인홀트 글리에르(Reinhold Glière)는 세르게이의 어머니를 "아름답고 영리한 눈을 가진 키 큰 여성으로… 따뜻함과 단순함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1877년 여름에 결혼한 프로코피예프 부부는 스몰렌스크 주로 이사했다가 학교 동창 드미트리 손초프(Dmitri Sontsov)의 요청에 따라 남편이 토양지질 분야 엔지니어로 취직하면서 우크라이나 대초원에 있는 그의 영지로 다시 이주했다. 세르게이가 태어났을 당시, 이전에 두 딸을 잃은 어머니 마리아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음악에 빠져들었다. 아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한 해에 두 달을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그래서 어린 세르게이는 늘 어머니가 저녁에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대부분 쇼팽과 베토벤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음악과 친해진 5세의 아들이 만든 첫 작품 '인도의 조랑말(Indian Gallop)'은 어머니 마리아가 악보로 받아 적었다. 세르게이는 9살 꼬마일 때 무려 첫 오페라인 <거인>(The Giant)과 관현악 서곡, 그리고 여러 다른 작품을 작곡한 천재였다. 이후 오페라는 프로코피예프가 가장 좋아해서 작업한 장르로 남았다.

마린스키극장이 공연한 프로코피예프 첫 오페라 '거인'.


특이하게도 세르게이는 7세 때 체스를 배워서 평생 그의 열정으로 남았다. 그는 13살 때인 1914년 동시 다면기(多面碁) 시범경기에서 이긴 세계 체스 챔피언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José Raúl Capablanca)를 만났고, 1930년대의 체스 명인 미하일 보트비니크(Mikhail Botvinnik)와도 알고 지냈다. 

1902년 어머니 마리아는 모스크바 음악원장인 세르게이 타네예프(Sergei Taneyev· 1856~1915)를 만났는데, 그는 세르게이더러 알렉산더 골든바이저(Alexander Goldenweiser)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라고 제안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타네예프는 대신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라인홀트 글리에르(Reinhold Glière)를 보내 1902년 여름 동안 손초프카에서 세르게이를 가르치도록 했다. 첫 번째 레슨 시즌은 11세 아이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밀도가 높았고, 아이의 싹트는 재능은 처음으로 교향곡을 쓰려고 시도했다. 그 다음 여름에도 글리에르는 손초프카를 다시 방문해 아이를 가르쳤다.  

수십 년 후 프로코피예프는 글리에르와의 수업을 회상하는 글에서 스승의 공감적 방법에는 적절한 공을 돌렸지만, 글리에르가 강조했던 ‘정사각형’ 구문 구조와 관습적 변조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를 잊어야 했다고 불평했다. 어쨌든 그로부터 필요한 이론적 도구를 갖춘 세르게이는 그가 나중에 ‘소곡집’(ditties, 더 정확하게는 3부 형식인 '노래 형식')이라고 불렀던 일련의 짧은 피아노 작품에서 불협화음적 화성과 특이한 박자 기호를 실험하는 등 자신의 음악 스타일의 토대를 마련했다.

스푸트니크지에 실린 프로코피예프 부부와 아들 세르게이의 희귀사진.

이렇게 하여 그의 재능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어린 나이에 아들이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는 것을 주저했고, 대신 모스크바의 좋은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고려했다. 1904년에 그의 어머니는 그보다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낫다고 생각해 그곳을 방문, 그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인 작곡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Alexandr Glazunov)를 소개받았다. 

세르게이의 음악을 보고 싶어한 글라주노프에게 13살의 세르게이는 그동안 완성한 두 개의 오페라인 <황무지 섬>(Desert Islands)과 <전염병 속 잔치>(The Feast during the Plague), 작곡중인 네 번째 오페라 <운디나>(Undina)를 전달했다. 글라주노프는 매우 감명을 받아 어머니에게 아들을 음악원에 도전시키라고 권했다. 세르게이는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1904년 가을에 등록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 농민음악의 세례를 받으며 자란 천재는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