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별했던 75년 공동경영의 전통…최윤범 회장 독자노선에 갈등 폭발

[고재학의 경제이슈 분석] 영풍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 vs 고려아연 "회사 성장에 발목" 고려아연-영풍, 핵전쟁의 계기는 ‘서린상사’ 경영권(장씨 3세) 박탈 경영권 향배 '고려아연 주가, 법원 판단, 정치권 움직임' 등 주요 변수

2024-10-06     고재학 기자

 

2020년대 들어 최씨 가문 3세인 최윤범 회장이 고려아연의 경영을 책임지면서 두 집안의 갈등이 본격화했다.

◇ 2022년 최윤범 회장 취임 이후 사업 방향 놓고 충돌 본격화

① 최윤범 회장의 신사업 진출: 최창걸 명예회장이 건강상 이유로 물러난 뒤 3세 최윤범 회장이 고려아연의 새 선장으로 키를 잡았다. 그는 고려아연을 전통적인 비철금속 회사가 아닌 신재생에너지·2차전지 소재·리싸이클링 등을 아우르는 혁신기업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 부채를 늘려가며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2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자사주 공개매수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무차입 경영’이 가풍인 최대 주주 장씨 측은 고려아연 주주 총회에서 최윤범 회장의 공격적인 투자 계획을 반대했다. 고려아연의 신사업 진출을 무작정 반대한 게 아니라, 최대 주주로서 최 회장의 불투명한 투자와 무리한 확장 시도를 지적했다는 입장이다.

이에 최 회장은 고려아연이 국내 2차전지 산업 밸류체인 내 핵심 회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도 영풍이 발목을 잡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영풍에 대한 장씨 일가의 지배구조가 확고해지자 동업자 정신을 저버린 채 고려아연 경영에 사사건건 개입한다는 주장이다. 최 회장이 사업 확장 과정에서 현대차, 한화, LG화학 등에 제3자 유상증자를 하면서 장씨 측 지분율이 줄어들고, 최 회장 우호 지분율이 늘어나면서 갈등은 더 심해졌다.

② 잘 나간 고려아연: 고려아연은 세계 최고의 아연제련 회사로 독보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 매출 9조7,045억원, 영업이익 6,599억원, 당기순익 5,333억원의 실적을 냈다. 반면 영풍은 본업인 제련 부문에서 3년 연속 적자를 기록 중이다.

고려아연은 작년에 88만톤의 아연을 생산했지만, 영풍 생산량은 32만톤에 불과했다, 석포제련소 환경 이슈에 따른 소송 등으로 영풍의 아연 생산량은 더욱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장씨 가문 입장에서 영풍의 핵심 계열사인 고려아연을 떼어내면 사세가 크게 쪼그라드는 상황이다. 영풍은 최근 5년간 고려아연 지분에 따른 배당금으로 3,576억원을 받았는데, 고려아연이 떨어져 나가면 막대한 배당금도 줄어들 게 뻔하다.

③ 서린상사 경영권 다툼이 결정적: 올들어 두 가문 동업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비철금속 수출 회사 ‘서린상사’를 두고도 갈등이 이어졌다. 서린상사는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비철금속 해외 수출을 위해 1984년 설립한 기업으로,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와 영풍의 석포제련소가 생산하는 비철금속의 수출·판매·물류를 전담해왔다.

서린상사 최대 주주는 지분 66.7%를 보유한 최씨 일가와 고려아연이다. 나머지 33.3%는 장병희 창업자의 손자이자 장형진 고문 아들인 장세환씨가 갖고 있다. 영풍과 고려아연 관계와는 거꾸로, 최씨 일가가 지배하면서 경영은 장세환 대표가 맡아왔다. 그런데 최윤범 회장 측이 6월 주주총회에서 장 대표의 경영권을 박탈했다. 이어 서린상사 사명을 ‘KZ트레이딩’으로 변경했다. 영풍빌딩에 있던 고려아연 본사를 종로구 그랑서울 빌딩으로 이전하고 창립 이래 영풍과 함께 써왔던 로고도 바꿔버렸다. 영풍과의 결별을 공식화한 것이다. 분노가 폭발한 장 고문이 최 회장 경영권을 빼앗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사건이었다.

◇ 영풍 vs 고려아연, 지분 확보 대결의 승자는?

영풍과 고려아연 간 경영권 분쟁이 사모펀드(PEF) 운용사 MBK파트너스의 참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맡고 있다. MBK와 영풍 측은 고려아연 지분 공개매수와 함께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개인의 비리 의혹에 공세를 집중하고 있다.

2010년대 고려아연 지분은 영풍 측 약 35%, 고려아연 측 약 10%로 영풍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하지만 최윤범 회장이 우호지분을 끌어들이면서 지금은 영풍 측이 33.1%, 고려아연 측(우호지분 포함)이 34.3%를 갖고 있다. 국민연금(7.8%)과 의결권 없는 자사주(2.39%)를 빼면 시장 유통 물량은 22.5% 수준이다. 결국 이 가운데 얼마나 많은 지분을 우군으로 확보하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증권업계에선 영풍과 MBK파트너스의 자금력을 고려아연이 앞서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고려아연 입장에선 영풍 측이 지분율 과반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의결권 있는 주식 약 6%만 추가 취득하면 되기 때문에 금융권 차입 등을 통해 지분 방어에 사력을 다할 것으로 예상된다.

◇ 향후 승패의 변수는 고려아연 주가, 정치권 및 국민연금 의중

영풍과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향방을 좌우할 변수는 다음과 같다.

① 고려아연 주가: 2일 현재 고려아연 주가는 71만3,000원. MBK는 주당 66만원인 공개매수 가격을 75만원으로 상향했다. 공개매수 발표 이후 고려아연 주가가 70만원을 돌파하자 66만원에 주식을 넘길 투자자가 많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고려아연은 2일 영풍이 최윤범 회장 등을 상대로 낸 '자사주 취득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기각한 직후 이사회를 열어 자사주 공개매수를 결의했다. 사모펀드 베인캐피탈과 함께 4일부터 23일까지 총 3조1,000억원을 투입해 주당 83만원에 발행주식 총수의 18%를 공개매수한다는 계획이다.

영풍∙MBK 연합의 공개매수 마지막 날인 4일에도 고려아연 주가가 75만원을 넘지 못하면, 이번 분쟁은 영풍∙MBK 연합의 승리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반면 75만원을 뚫고 올라가면 기존 주주들이 23일까지 진행되는 고려아연의 자사주 공개매수에 보유 주식을 팔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고려아연은 일단 경영권 방어에 성공하는 셈이다.

② 법정 공방: 영풍은 법원에 고려아연의 자사주 취득 목적 공개매수 절차 중단 가처분을 다시 신청했다. 고려아연이 평시 주가보다 훨씬 높은 공개매수 가격(주당 83만원)에 자사주를 사들이는 행위는 배임이라는 것이다. 영풍은 자사주 공개매수를 결의한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을 비롯한 이사진을 형사 고소하기도 했다.

고려아연도 “자사주 취득 가능액이 586억원”이라고 주장한 MBK와 영풍에 대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다. 고려아연의 자사주 취득 한도는 6조원에 달하는데, 영풍∙MBK가 허위사실을 유포해 시세조종과 시장교란 행위를 했다는 주장이다. 고려아연과 영풍∙MBK가 서로에 대한 고소·고발 및 가처분 등 다양한 쟁송(爭訟)을 벌이고 있어 공개매수에 따른 경영권 분쟁이 마무리돼도 양측의 법정 공방은 장기간 이어질 전망이다.

③ 정치권 움직임: 고려아연은 “MBK가 경영권을 인수해 해외 자본에 매각한다면 국가 기간산업 및 2차전지 소재 핵심 기술이 유출될 수 있다”며 여론전을 펴고 있다. 이미 울산시장과 울산시의회가 고려아연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여당과 야당도 최 회장과 장형진 고문 등을 국정감사 증인으로 부른 상태다. 민간 기업 M&A에 지방정부가 나서는 것은 과하다는 지적이지만, 정치권 움직임과 여론의 향배를 무시하긴 어렵다.

④ 국민연금 의중: 국민연금은 고려아연 지분 7.8%를 보유한 주요 주주다. 대기업들의 경영권 분쟁에 개입해 사태를 수습한 전례도 있다. 만약 국민연금이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준다면 외국인 주주, 소액주주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고재학은 한국일보에서 33년간 기자로 일하며 경제부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을 지냈다. 올해  6월 뉴스버스 공동대표로 합류해 경제 부문을 맡고 있다. 뉴스버스TV에서 주요 경제 이슈를 정리해주는 ‘고재학의 경제버스’를 진행한다. 스테디셀러 <부모라면 유대인처럼>을 비롯해 <절벽사회> <휴대폰에 빠진 내 아이 구하기> 등의 책을 썼다. 우직하게 객관주의 저널리즘의 힘을 믿는 언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