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민족음악에 큰 업적을 남긴 림스키-코르사코프 vs 1차대전 참전후 전환기를 겪은 라벨
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 20 오케스트라 색채의 마술사들 '림스키-코르사코프 & 라벨' (7)
서양음악사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의 편성은 계속적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였다. 서유럽은 대항해 시대와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했고,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왔다. 비싼 유지 비용이 들었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교회와 궁정을 벗어나 신흥 부자계급인 부르주아들을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받아들였다.
음악이 부르주아들의 필수 교양이 되고,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을 때, 오페라단과 오케스트라는 교회와 궁정의 품을 떠나 시민의 품으로 나아갔다. 티켓을 돈 내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오페라의 규모는 더 커졌고, 오케스트라의 편성도 확대되었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합치면 총 16시간이나 되는 대작이다. 말러의 교향곡 8번은 초연에 1,000명의 연주자가 동원되어 ‘천인교향곡’으로 불린다.
클래식 음악 좀 들었다 하는 사람들은 BMW를 듣기 전에 교향악을 논하지 말라 했다. 브루크너, 말러, 바그너의 이니셜 첫 글자를 모은 것이다. 이들은 관현악의 편성을 극단적으로 확대해 음량과 다양한 음색 면에서 압도적인 사운드를 달성해낸 작곡가들이다. 풍요의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idides trap)이라는 정치학 법칙은 기존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 대항하는 독일이라는 신흥세력의 등장에 따라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 충돌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클래식 음악계는 현대음악의 충격을 맞이하게 된다.
러시아 5인조 음악을 집대성해낸 림스키-코르사코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Andreyevich Rimsky-Korsakov·1844~1908)는 1887년 교향곡 3번 개정판의 초연을 포함한 벨랴예프 후원의 러시아 교향곡 콘서트 시리즈를 열었다. 이해 11월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교향곡 1번 ‘겨울의 백일몽(Winter Daydreams)'을 부제로 붙인 이 공연들에서 처음으로 겨울의 백일몽을 완전 연주하기 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왔다.
방문 전부터 서신을 교환하던 둘은 글라주노프, 랴도프와 함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1876년부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차이코프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으로 임명하겠다는 제안까지 할 정도로 신뢰했다.
그러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겉으로는 신사적으로 대했지만, 차이코프스키와 국민음악 5인조의 음악 철학의 차이로 인한 긴장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러시아 국민음악의 한계를 넘어선 그였지만, 차이코프스키의 동생 모데스트(Modest)는 "우호적인 두 이웃 국가 사이의 관계"에 비유해 '극심한 긴장 속에 서로의 이익을 질투심으로 보호하는' 미묘한 관계로 표현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벨랴예프 서클의 작곡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음악보다 더 유명해지면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질투는 악화되어갔다. 그 미묘한 감정을 감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1893년 5월 차이코프스키에게 다음 시즌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음악 협회의 4회 연주회를 지휘할 수 있는지 물었고, 차이코프스키는 망설이다 동의했다. 1893년 말 차이코프스키가 갑자기 죽어 계약이 이행되지는 못했지만, 지휘 예정 레퍼토리에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곡 3번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1889년 3월, 안겔로 노이만(Angelo Neumann)이 이끄는 리하르트 바그너 극단(Richard Wagner Theatre)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칼 무크(Karl Muck)의 지휘로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의 4부작을 공연다. 러시아 5인조는 바그너의 음악을 무시했지만 5인조의 일원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바그너의 뛰어난 관현악 편성에 놀라 악보를 연구하고 리허설과 공연까지 본 후, 남은 창작 생활 동안 오페라 작곡에 전념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바그너에 매료됐지만, 바그너보다 더 모험적인, 특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나중에는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의 음악을 수용하기엔 아직 시기상조였다. 피아니스트 펠릭스 블루멘펠트(Felix Blumenfeld)의 드뷔시 연주를 듣고, 그는 일기에 "조악하고 빈약하다. 기법도 없고 상상력도 부족하다"고 썼다. 하지만, 자신의 음악과 다른 사람들의 음악도 면밀히 들여다보게 되어 음악적 감식력을 높여갔다. 5인조의 친구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의 첫 번째 개정판을 작업하는 기간인 1895년 편집자인 바실리 야스트렙체프에게 "지금은 이 음악을 좋아할 수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그런 때가 있었다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러시아 5인조의 작품을 편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1860~1870년대 서로의 작곡 진행 과정을 듣고 함께 작업했던 그들의 미발표 또는 유실되었을 작품까지 살리려는 노력이었다. 여기에는 보로딘이 죽은 후 글라주노프의 도움을 받아 작업한 오페라 <이고르 공>(Prince Igor)의 완성과 1869년 첫 제작을 위해 큐이(César Cui)의 ‘윌리엄 랫클리프의 악절’ 편곡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1881년 무소르그스키가 사망한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출판과 공연을 위해 무소르그스키의 여러 작품을 수정하고 완성하여 러시아 전역과 서유럽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그렇지만 음악학자 매이스(Maes)는 무소르그스키의 악보를 검토하면서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음악적 과잉 실험 또는 열악한 형식으로 변경하거나 제거해 무소르그스키 고유의 음악성을 일부 훼손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이후 작업에 영향을 끼친 것은 러시아 민속에 대한 접근 방식이었다. 발라키레프와 5인조의 다른 멤버들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민속 춤과 노래 ‘프로챠즈나야’(protyazhnaya)는 '끌어낸 노래'라는 뜻을 가진 러시아어인데,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노래로 극단적인 리듬의 유연성, 비대칭적인 프레이즈 구조, 음색의 모호함이 특징이었다. 이 ‘프로챠즈나야’ 노래들은 시골 풍습의 일부이자 옛 슬라브 이교도와 범신론적인 민속 의식 세계를 반영한 것들이었다. 민요 모음집을 편집하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프로챠즈나야’에게 푹 빠져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
"태양 숭배의 시적 측면에 매료되었고, 노래의 가락과 가사에서 그 생존과 반향을 찾았습니다. 고대 이교 시대와 정신에 대한 그림이 내 앞에 어렴풋이 나타났습니다. 그런 다음 그것은 매우 명확하게 고대의 매력으로 나를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후 작곡가로서 나의 활동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연히 그의 <황금닭(또는 금계, The Golden Cockerel)>중 여왕의 아리아 ‘태양의 찬가’ 등을 포함해 그의 후속 오페라들에선 이런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애국자 라벨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조셉 모리스 라벨(Joseph Maurice Ravel·1875~1937)은 프랑스 공군에 합류하려고 했다. 그는 작은 키와 가벼운 무게가 비행사에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도 많고 가벼운 심장 질환도 있어 공군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입대 재신청후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 동안 라벨은 아카펠라 합창단을 위한 유일한 작품인 <3개의 샹송(Trois Chansons)>을 작곡했다. 16세기 프랑스 샹송의 전통에 자신의 가사를 붙여 입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헌정하며 계속 입대를 시도한 결과, 마침내 40세가 된 1915년 3월 제13포병연대에 트럭운전병으로 들어갔다.
스트라빈스키는 "나이와 명성을 고려하면 더 쉬운 자리에 가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며 친구의 용기에 감탄했다. 라벨의 임무 중에는 독일군의 빗발치는 포격을 뚫고 밤에 군수품을 운반해야하는 위험한 일들도 있었다. 종군 중 들려온 어머니의 건강 악화 소식에 상심한 나머지 라벨의 건강도 악화했다. 그는 불면증과 소화 장애로 고통받았고, 1916년 9월 아메바성 이질로 인해 장 수술을 받았으며, 이듬해 겨울에는 발에 동상이 걸렸다.
전쟁 중에 라벨의 독립음악협회와 맞섰던 전국음악협회의 생상스(Saint-Saëns), 뒤부아(Dubois), 댕디(d'Indy) 등은 프랑스 음악 수호를 위한 전국연맹(Ligue Nationale pour la Defense de la Musique Française)을 결성하여 현대 독일 음악 연주 금지 캠페인을 벌였다. 라벨은 가입을 거부하고 1916년 연맹 위원회에 반대 의견을 제출했다. "프랑스 작곡가들이 외국 동료들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무시하여 일종의 국가적 동인, 즉 우리 음악 예술을 형성하는 것은 위험할 것입니다. 현재 부유한 사람들은 곧 타락하여 진부한 공식에 고립될 것입니다." 연맹은 콘서트에서 라벨의 음악을 금지시켰다.
라벨의 어머니는 아직 전쟁이 진행중인 1917년 1월에 세상을 떠났고, 아들은 ‘끔찍한 절망’에 빠졌다. 전쟁 중에 조국 국민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군인으로 참전한 라벨은 더욱 공감이 커졌고, 눈앞의 참상에 거의 작곡을 할 수 없었다. 피아노 3중주는 전쟁이 개시될 무렵 거의 완성되었다. 전쟁기간 작곡된 가장 중요한 작품은 1914년에서 1917년 사이에 작곡된 <쿠프랭의 무덤(Le tombeau de Couperin)'이었다. 이 모음곡의 각 악장은 전쟁에서 사망한 라벨의 친구에게 헌정되었다.
1918년 전쟁이 끝난 후 라벨과 가까운 사람들은 그가 육체적, 정신적 체력을 소진했음을 깨달았다. 그해 드뷔시가 사망한 후, 그는 프랑스와 해외에서 그 시대의 선도적인 프랑스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스승 포레(Fauré)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자네가 차지하고 있는 탄탄한 지위와 그토록 훌륭하고 빠르게 획득한 확고한 지위에 대해 당신의 생각보다 더 행복하다네. 자네의 노교수에게 기쁨과 자부심의 원천이지."
1920년 라벨은 음악적 업적에 종군의 공훈을 더해 최고의 영예인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수여를 제안받았으나 훈장을 거절했다. 이 장면은 사티(Satie)의 제자 6인조(Les Six)로 대표되는 신세대 작곡가들에게는 더욱 확실한 인상을 주었다. 사티는 이런 찬사를 돌렸다. "라벨은 레지옹 도뇌르를 거부하지만 그의 모든 음악은 충분한 수상자격이 있다” 라벨은 자신의 발전에 사티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나아가 라벨은 6인조(Les Six)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그들의 음악을 홍보하고 언론의 공격으로부터 옹호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자연스럽고 자신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여겼다. 독립음악협회(Société Musicale Indépendente)를 통해 그는 그들과 다른 나라의 작곡가들까지 격려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협회는 아론 코플란드(Aaron Copland), 버질 톰슨(Virgil Thomson), 조지 앤씰(George Antheil)을 포함한 미국 작곡가와 본 윌리암스(Vaughan Williams), 아놀드 박스(Arnold Bax) 및 시릴 스코트(Cyril Scott) 등 영국 작곡가들의 최신작들을 콘서트에 올렸다.
음악학자 오렌슈타인(Orenstein)과 장크(Zank)는 비록 라벨의 전후 작품은 평균 1년에 한 곡밖에 작곡하지 못할 정도로 숫자는 적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1920년에 그는 발레 뤼스의 단장 디아길레프의 의뢰에 따라 ‘라 발스’(La valse)를 완성했다. 하지만 곡을 들은 디아길레프는 "그것은 걸작이지만 발레는 아니다. 발레의 초상"이라며 거부했다. 라벨은 항의나 논쟁 없이 디아길레프의 판단을 전해듣고 그와의 작업을 그걸로 끝냈다.
음악사학자 니콜스(Nichols)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벨은 디아길레프가 죽기 전에 발레 뤼스의 다른 경영진이 나서서 두 번 공연한 발레를 보고 만족했다고 기록했다. <쿠프랭의 무덤> 관현악 버전에 맞춰 춤추는 발레가 1920년 11월 샹젤리제 극장(Théâtre des Champs-Elysées)에서 공연되었고, 12월에는 ‘라발스’의 초연이 이어졌다. 이듬해 <다프니스와 클로에>(Daphnis et Chloé)와 <스페인의 시간>(L'heure espagnole)은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성공적으로 부활했다.
1920년대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풍요로웠던 벨르 에포크(Belle Epoche)에 대한 동경과 추억 대신 이전의 것들에 대한 회의와 혼란 속에 음악 쪽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일어났다. 라벨 역시 이 큰 흐름에 참여하게 된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