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페르소나, 평화의 여정에 들다’ 화가·판화가 김동연

경기 양평군 강하면 카포레 갤러리 10월 1~31일

2021-10-01     심정택

먹구름이 지나간 몽골 초원에 부는 바람은 작가에게 태고의 생명을 찾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든 생태든 기억은 사라지고 가젤 떼만이 살기 위해 내달린다. 그는 초원에서 돌을 보았다.

초원은 산맥을 건너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나 수만년 한 자리에 박혀있는 땅의 혼(魂), '제니우스 로사이(genius loci)'가 부른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방인의 화가에게 다가온 것이다. 계곡은 깊고 길은 멀리 뻗어있다. 사막보다도 더 강한 햇볕은 설산의 음영과 대비되어 암벽은 붉고 강렬하다. 

Grassland. 90x60cm. Acrylic on linen. 2021

바다인지 평야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몽골 남부 고비사막 중앙, 소도시 달란자드가드의 서쪽에 우뚝한 설산을 마주한 여행 이후 김동연은 청랑한 숨을 쉴 수 있었다. 현실의 세계, 작업실로 모티프를 가져왔다.

물질 덩어리로서의 거대한 산을 그렸으나 화면의 산 계곡에서 길을 잃기도 하면서 푸른 초원을 대입하며 하늘과 구름을 단순화한 위아래 이분(二分) 구도의 화면이 남겨졌다.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선상에 머무른 듯 하다. 

펄 벅의 소설 ‘대지’에 등장하는 모티프중의 하나인 ‘땅과 하늘’은 따로 놀지 않고 한 줄기 거대한 서사의 소재가 되지 않나.

Blue hill. 130.3x89.4cm. Acrylic on linen. 2021

작품은 청소년기의 생래적 기운과도 통한다. 경북 봉화 출신 김동연은 산과 흙을 접하면서 성장했다. 대지가 계절을 바꾸며 자연 만물을 품는다는 법칙을 몸으로 느꼈다. 

영주에서 고교를 마치고, 대구의 대학에서 서양화 전공 후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나 대부분 그러하듯이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에 디자인회사와 광고 회사를 거쳐 1990년 신문사에 입사해 10 년간 편집국 미술부 기자로 일하면서 시사 만평을 담당했다. 2001년부터 작가의 길에 본격 들어섬과 동시에 출판 관련 디자인 회사를 설립하여 200여권의 단행본 디자인, 150여권의 책과 잡지에 일러스트를 기고했다. 
  
검푸른 화면에 홀로 혹은 짝을 이뤄 등장하는 인물은 머리에 방독면이나 짐승 뼈를 쓰고 있다. 이러한 가면은, 타인들의 눈에 비친 그의 실제와는 다른 모습의, 자아를 상실한 과거 모습들을 나타낸 페르소나(persona)이다. 

2010년부터 4~5년간 집중적으로 인체 작업에 몰두하였다. 인간의 소외, 외로움, 부조리 등 고뇌를 담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작가는 현대인의 심리와 권태, 불안, 우울, 근원적인 욕망 등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한편으로는 밑그림을 에어브러시로 하는 작업 과정에서 나오는 분진을 차단하고자 작업 공간을 밀폐 수준으로 구분해야했고, 노동 강도 또한 심했다.

작업 과정이 인간적으로 고통스러웠다. 이전 직업을 영위하며 부딪혔던 사람들을 기억 속에서 소환, 조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신문사 만평 작가로서 국내외 시사 이슈를 다루었으나 취재 기자들과 달리 현실 문제에 대한 은유나 풍자 등의 표현에 있어 편집자의 간섭을 심하게 받았다. 퓰리처상 수상자들 상당 수가 카투니스트이나 작가를 언론사 편집국의 기능인으로 종속시키려는 한국의 신문사 사내 문화에 절망하였다. 일러스트레이트 작품은 대부분 주문을 받아 만들어져 창작물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신성한 밥벌이를 대신해 주었다. 

화려한 꽃과 도안,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과 옷자락에 둘러싸인 미소녀 캐릭터로 상징되는 체코 작가 알폰스 무하(Alphonse Mucha, 1860~1936)가 석판화로 작업한 장식용 패널은 인간의 육체와 자연의 다양한 관계를 표현한다. '꽃'은 단순히 여성을 둘러싸는 장식으로 그치지 않고, 꽃이 마치 여성의 몸 일부분이 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김동연에게 이 여체를 돋보이게 하는 꽃은 숲으로 치환된다. 동판화(에칭) 방식으로 잉크에 묻어나는 대부분의 작품은 검은 숲에서 벗어나 점점 인체와 조화되는 화려한 색을 입힌 숲으로 변하고 있다. 그의 판화 작품중 압권은 미와 사랑의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가 현신한 듯한 일련의 시리즈이다.  

Adam & Eve. Letterpress 동판화.  38x56 cm.  2021 

15세기말 산드로 보티첼리의 작품 <비너스의 탄생(The Birth of Venus)>에서 비너스는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 즉 정숙한 비너스라는 고전 조각의 특정 유형을 따른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왼손과 머리카락으로는 음부를 가린 자세이다. 그의 작품중 상당 수는 춘화로도 볼 수 있다. 예술은 금기와 터부를 깨는 지난한 과정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비너스 푸티카를 요구한다.

Deep Kiss. Letterpress 동판화.  28x38 cm.  2021

화가이자 판화가인 김동연은 동판화외에도 책 인쇄 원리인 활판(Letterpress printing. 活版) 작업도 한다. 제작 과정이 동판화와 비슷한 레터프레스는 판면(동판 도는 아연판)이 돌출된 형태로 부식시켜 찍는다. 판화 용지에 찍힌 최종 작업은 그림의 선과 면이 아래로 움푹 들어가는 형태(debossing 음각)로 나타난다. ‘밀도있게 작업하다 보면 엄청난 깊이를 느낀다.’고 말한다.

국내 미술 시장에서 판화의 부진은 근본적으로는 이 땅에 근·현대 미술 사조가 동시에 유입된 짧은 서양미술의 역사에 기인한다. 붓으로 직접 유화와 아크릴로 찍은 페인팅만을 순수미술로 보는 무지몽매함이 바탕에 깔려있다.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램브란트는 화가이자 판화가였다. 그의 많은 대표 작품들이 동판화이다. 현대 서양 미술의 역사가 깊은 중국은 이미 1920년대에 대문호 루쉰을 중심으로 독일 목판화 및 조각가인 캐테콜비츠의 영향을 받아 목판화 운동도 일어나지 않았나.  

또 부진 원인중 하나는, 일부 대형 팬시업체들이 옵셋 인쇄를 판화라고 속인다. 이들 업체들은 작품 촬영후 색 분해를 최소화하여 판화라고 주장한다.  

현대미술가 바버라 크루거(Babara Kruger, 1945~ )는 잡지 회사 디자이너, 출판사 그래픽 디자이너, 아트 디렉터, 사진 편집자를 했다. 그의 이러한 경력은 광고 기법을 활용한 작가 고유의 스타일을 만드는 핵심 근간이 된다. 흑백 이미지와 붉은 프레임, 강렬한 텍스트의 결합이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크루거는 1989년부터 이미지와 텍스트가 입체적인 공간으로 확장된 설치와 영상 작품을 제작했다.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라 불리는 19세기 영국인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는 말년에 책 공방을 연다. 모리스는 중세의 글꼴을 모범으로 하는 새로운 글꼴을 만들어 책 만들기에 몰입하였다.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작품집이다.

미술사는 1945년 2차 대전 종전이후를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로 구분짓는다. 21세기에 진입한지 20여년, 순수 미술과 응용 미술, 서양화와 동양화, 건축과 미술의 경계와 영역 구분짓기가 무너진지 오래되었다. 

순수 미술을 배웠고, 현대 사회의 시각 디자인의 최첨단 부문에서 닦은 응용 미술과의 결합 능력은 작가의 작업 장르 스펙트럼 확대로 가속화되고 있다. 김동연은 2014 년 경부터 해외 워크샵 및 초대전시회를 통해 작품을 발표해 오고 있다. 60 여점의 회화, 40 여점의 판화로 이루어지는 그의 대규모 개인전 <왜곡된 풍경들Ⅱ>은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카포레 갤러리에서 10월1일 부터 10월 31일까지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3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