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조력자와 결혼한 림스키-코르사코프 vs 평생 독신의 은둔자 라벨

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20 오케스트라 색채의 마술사들 '림스키-코르사코프 & 라벨' (4)

2024-08-18     김용만 음악칼럼니스트

서양음악의 낭만주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 관현악과 오케스트라는 급격히 발전해 지금의 오케스트 형태를 확립했다. 소규모의 궁정 오케스트라로부터 시작된 다양한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발전 과정은 서양 음악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자본주의가 유럽에 정착하고, 식민지에서 물산이 쏟아져 들어오며 이전에 귀족들만 즐기던 음악은 부르주아 전반에 갖추어야 할 교양으로 바뀌었다.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이 도시마다 경쟁적으로 지어졌으며, 음악 청중의 저변도 넓어졌다. 더 많은 청중을 수용하게 된 극장과 콘서트홀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히 오케스트라의 규모도 확대되었다.

오늘날 오케스트라 악기들은 거의 낭만주의 시대 중·후반에 지금의 모양으로 정착됐다. 그러나 악기들은 지금도 개량과 발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별한 음색을 원하는 작곡가들은 이들을 채용해 고유한 작품들을 생산해냈다. 오케스트라의 악기 구성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으며,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며 풍부한 음향을 만들어낸다. 이 흐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정규공연 악기배치.


후원자 가문의 딸과 결혼하며 5인조와 멀어진 림스키-코르사코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Andreyevich Rimsky-Korsakov·1844~1908)는 정식 음악원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군 장교 복무 중이던 27세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교수로 임용된다. 전기 작가 체틀린(Mikhail Tsetlin)에 따르면 새 원장으로 부임한 아잔체프스키(Mikhaíl Azanchevsky)의 보수적인 음악원 개혁 시도가 그 배경이었다. 

아잔체프스키는 초임 치고는 높은 보수를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제안했다. 그 이유는 첫째,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러시아 국민음악 5인조 중에 반대자들로부터 비판을 가장 덜 받았고, 음악원이 모든 음악가들을 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음악원의 주류였던 보수적인 서구 스타일의 환경에 노출되도록 하는 것도 계산에 포함돼 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멘토 발라키레프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다른 사람들이 민족주의 음악의 대의에 동참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음악원 교수 자리를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당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군악대에서 세계를 돌며 접한 음향을 재해석한 오케스트레이션의 대가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화음의 이름이나 간격도 몰랐을 정도로 음악 이론에 대한 그의 지식은 기초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주로 화성학-대위법보다는 직관을 통해 작품들을 썼다. 음악원 당국에서 해군 제복을 입고 포디움에 오르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적이 없었다.

자신의 기술적인 단점을 인식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문의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정식 교육을 받았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차이코프스키는 그에게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이로 인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5인조의 다른 사람들간 접촉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음악원에서 가르치는 동안 수업이 나에게 준 정보의 양과 가치로 판단하면 아마도 최고의 학생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는데, 바로 자신을 지칭한 얘기였다. 그는 제자들보다 한 발 앞서 3년 동안 안식년을 갖고 창작 활동을 했으며, 집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음악원에서 강의도 했다. 그는 음악이론 교과서를 파고들며 독학했고, 대위법 연습, 푸가, 합창, 아카펠라 합창을 작곡하는 엄격한 방식을 따랐다.

이렇게 공부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훌륭한 교수이자 제대로 된 교육의 신봉자가 되었다. 그는 공부로 축적된 기법을 이용해 1874년 이전에 작곡한 모든 작품을 수정했는데, <사드코>와 <안타르>같은 호평을 받은 작품까지 포함시켰다. 내친 김에 그는 지휘 기술도 마스터했다. 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의 질감을 다루고 관현악 수업에 적합한 음악 작품을 편곡하면서 관현악법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3년간의 공부 직후 작곡한 교향곡 3번은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그의 실제 경험이 반영되었다.

교수직으로 재정적 안정을 얻은 림스키-코르사코프는 가족으로 정착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러시아 5인조의 주간 모임을 하면서 관계를 발전시켜 왔던 푸르골드(Purgold) 가문의 영애 나데즈다(Nadezhda Purgold·1848~1919)에게  1871년 12월 청혼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러시아 군인 가문 출신이라 반대는 없었다.

결혼 무렵의 니콜라이와 나데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부부.


둘은 이듬해 7월에 결혼했고 그때까지 동거인이던 무소르그스키는 들러리를 섰다. 부부는 36년간의 세월을 함께 하며 7명의 자녀를 낳았다. 첫째 아들 미하일(Mikhail)은 곤충학자가 되었고, 또 다른 아들인 음악학자 안드레이(Andrei)는 작곡가 율리야 베이스베르크(Yuliya Veysberg)와 결혼하여 아버지의 삶과 작품에 대한 여러 권의 연구를 집필했다.

나데즈다는 클라라가 슈만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남편에게 음악적 파트너이기도 했다. 아름답고 유능하며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던 나데즈다는 결혼 당시 남편보다 음악적으로 훨씬 더 잘 훈련된 상태였다. 1860년대 중반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다니며 차이코프스키를 가르쳤던 니콜라이 자렘바(Nikolai Zaremba), 무소르그스키 등과 함께 음악 이론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데즈다는 남편의 작업에 대해 훌륭하고 가장 까다로운 비평가였다. 음악학자인 네프(Lyle Neff)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나데즈다가 결혼으로 인해 자신의 작곡 경력을 포기했지만, 남편의 첫 세 오페라 창작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여행하고 리허설에 참석하고 작품을 편곡했다. 남편의 사후 11년간 그녀는 남편의 문학 및 음악 유산을 편집 출판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 공연의 표준을 유지했으며, 림스키-코르사코프 박물관을 위한 자료를 준비하는 데 전념했다.“

로마대상에서 푸대접 받은 독신의 은둔자 라벨 

조셉 모리스 라벨(Joseph Maurice Ravel·1875~1937)은 1900년경 혁신적인 젊은 예술가, 시인, 비평가, 음악가들이 모인 파리의 비공식 그룹 아파치(Les Apaches)에 합류했다. 그들을 통해 접한 문학, 민속음악과 사운드로 인해 그는 새로운 오케스트라 음색의 표현기법에도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아파치들 속에는 드뷔시도 있었다. 12살 후배인 라벨은 1890년대부터 드뷔시를 약간 알고 있었고, 그다지 가까워지지 않았지만 우정은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1902년 앙드레 메사제(André Messager)는 파리 오페라 코미크(Opéra-Comique)에서 드뷔시의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Pelléas et Mélisande)의 초연을 지휘한 후 라벨과 음악적 의견을 나누었다. 보수적인 파리 음악원장 뒤부아(Dubois)는 어이없게도 음악원 학생들의 참석을 금지했으며, 메사제의 친구이자 전 교사였던 생상스(Camille Saint-Saëns)는 이 작품을 싫어하는 대표적 인사였다. 반면 아파치들은 드뷔시를 열렬히 지지했다. 이 오페라가 14회 공연되는 동안 라벨은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드뷔시는 인상주의 작곡가라는 딱지를 싫어했지만 음악 애호가들은 동일한 용어를 라벨에게도 붙이기 시작했다. 두 작곡가의 작품은 종종 단일 장르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라벨은 드뷔시는 인상주의이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음악학자 오렌슈타인(Orenstein)은 작곡에 있어서 드뷔시가 더 자연스럽고 파격적 기법도 주저하지 않은 반면 라벨은 세련성과 장인정신에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평가했다. 라벨은 드뷔시에 대해 "자신만의 법칙을 창조하고 끊임없이 진화하며, 자유롭게 표현하면서도 항상 프랑스 전통에 충실한 위대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또 ”음악가이자 인간인 드뷔시에 대해 나는 깊은 존경심을 느꼈다. 내 본성은 드뷔시와 다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항상 [그의] 상징주의와 반대되는 방향을 따라왔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20세기 초 라벨의 작품들인 피아노곡집 <물의 유희>(Jeux d'eau)를 포함해 현악 4중주와 관현악곡인 ‘셰헤라자데’(Shéhérazade)에 대해 "드뷔시의 영향에 대한 경의와 퇴폐"라고 평가했다. 

두 작곡가는 1900년대 중반에 음악적 이유나 개인적인 이유로 우호적인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한 작곡가의 지지자들이 다른 작곡가를 폄하하는 등 파벌을 형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작곡가의 작품 연대기와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라벨 반대파 진영의 숙적 랄로(Lalo)는 "드뷔시는 모두 감성적인 반면, 라벨은 기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성도 주저 없이 차용하는 무감각을 소유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둘의 사이도 소원하게 만들었다. 라벨은 "비논리적인 이유지만 냉담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기작가 니콜스(Nichols)는 둘 사이 균열의 또 다른 이유를 제시했다. 1904년 드뷔시가 아내 릴리를 떠나 가수 엠마 바르닥(Emma Bardac)과 함께 동거에 들어간 뒤 라벨이 버림받은 불쌍한 릴리를 돕고자 절친한 여성 친구들인 미샤 에드워즈(Misia Edwards) 및 오페라 스타 뤼시엔느 브레발(Lucienne Bréval)과 함께 모금운동을 했다는 것이다.

미묘한 관계였던 드뷔시와 라벨(오른쪽).


라벨은 반항적인 젊은 에술가들과 함께 하면서도 제도권의 명예를 등지지 않았다. 새로운 세기의 첫해 동안 라벨은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젊은 작곡가상인 로마대상(Prix de Rome)을 받기 위해 5번의 시도를 했다. 과거 베를리오즈, 구노, 비제, 마스네, 드뷔시가 우승해 로마 유학을 갔던 이 콩쿠르에서 라벨은 1900년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이듬해에는 아깝게 2등을 했다. 1902년과 1903년에는 입상조차 못했다. 음악학자 란도르미(Paul Landormy)에 따르면 심사위원들은 라벨이 패러디처럼 보일 정도로 학술적인 칸타타를 작품으로 제출해 그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랄로를 포함해 그의 음악에 공격적인 비평가들조차도 그의 1라운드 탈락에 대해 정당한 심사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음악원의 수석 교수인 샤를 레네프뵈(Charles Lenepveu)가 심사위원단에 포함돼 있고 그의 학생들만 최종 결선에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언론들도 분노했다. 이 논란은 전국적인 스캔들로 번져 뒤부아(Dubois)는 파리 음악원장 직을 조기 은퇴했고, 프랑스 정부는 음악원의 급진적인 개편을 수행하기 위해 포레(Fauré)를 신임 원장으로 지명하기에 이르다.

이 논란에 깊은 관심을 보인 사람들 중에는 랄로가 기고하는 르 마탱(Le Matin) 지의 소유주이자 편집자인 알프레드 에드워즈(Alfred Edwards)도 있었다. 그의 아내는 라벨의 친구로, 드뷔시의 버림받은 아내 릴리를 위해 손잡았던 미샤(Misia)였다. 부부는 라벨을 데리고 1905년 6~7월에 요트를 타고 7주간의 라인 강 크루즈를 떠났는데, 라벨에게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라벨의 내성적이고 비밀스러운 성격은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벨의 사생활에 대해 밝혀진 것은 별로 없다. 라벨은 소수의 선택된 친구들과만 어울리며, 파리 근처 랑부예(Rambouillet) 숲의 몽포르 라모리(Montfort-L’Amaury) 에 있는 시골 별장에서 반(半)은둔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와 교유했던 영국 작곡가 본 윌리암스(Vaughan Williams)의 회상은 라벨의 사생활에 대해 어떤 단면을 제공해준다. 본 윌리암스와 로젠탈(Rosenthal) 및 여성 작곡가 마르그리트 롱(Marguerite Long)은 모두 라벨이 매음굴을 자주 방문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롱은 여성의 시각에서 라벨의 성생활이 자신의 작은 키에 대한 자의식과, 그에 따른 여성에 대한 자신감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라벨이 유부녀 미샤(Misia Edwards)와 사랑에 빠졌거나, 바이올리니스트 엘렌 주르당-모랑쥬(Hélène Jourdan-Morhange)와 결혼하고 싶어 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로젠탈은 평생 독신이었던 라벨이 동성애자였을 수도 있다는 현대의 추측에 대해서는 일축했다. 이러한 추측은 벤자민 아이브리(Benjamin Ivry)의 2000년 출판 전기 <라벨의 삶>에서 다시 나타났으나 정설로 인정되지 못해 라벨의 성적 취향과 개인 생활은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