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로 고통받은 푸치니 vs 현모양처의 내조 받은 레스피기
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19 이탈리아 후기낭만의 광휘 '푸치니 & 레스피기' (5)
이탈리아가 서양문화 역사에서 갖는 위치는 특별하다. 사랑은 세상 종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모든 문화예술의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는 사랑 면에 있어서도 유럽에서 앞서간 나라였다. 중세 기사도 문학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시작된 십자군전쟁에 나갔던 기사들의 이야기로부터 만들어져 퍼져나갔다. 중세의 음유시인(minstrel)들은 기사도 이야기를 담은 음악들, 흔히 트루베르(trouveres)와 트루바도르(troubadour)라고 불리는 것들을 가지고 여러 지방을 떠돌며 귀부인들의 가슴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오늘날에도 남자들의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나라로 이탈리아가 손꼽힌다. 한번 반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정열적인 구애에 여행객 아가씨들이 홀랑 넘어가는 로맨틱하고 에로틱한 이야기는 인터넷에 차고 넘친다. 음악사에서도 신부였던 비발디도 사랑 때문에 교회를 떠났고, 파가니니도 수많은 여인들을 쓰러뜨렸으며,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유명 테너 가수들의 스캔들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베르디와 레스피기는 그 바람둥이들의 대열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에 속한다. 사실 작곡은 고도의 지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인 데 반해서 성악과 오페라 연기는 재능과 더불어 넘치는 끼가 요구되기에 어쩌면 오페라 남자가수들의 바람기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도리아 스캔들의 의혹과 푸치니
쟈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1858~1924)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세 작품의 연이은 성공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고향에 새 집도 사고 당시로서는 매우 럭셔리한 자동차도 일찍부터 사서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유럽은 물론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뉴욕 등에서 푸치니를 초청해 그의 작품 전체를 상연하는 일도 벌어졌다.
1903년 그는 <나비부인>을 작업하던 도중이었는데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운전기사를 채근했고, 급히 몰던 차가 낭떠러지로 굴러 중상을 입고 말았다. 다행히 상반신은 멀쩡했지만 푸치니는 휠체어 신세를 져야했다. 푸치니보다 두살 연하인 부인 엘비라는 1886년에 유부녀의 몸으로 남편을 버리고 푸치니를 따라가 20년 가까이 동거하던 상황이었다. 호적상 남편으로 남아있던 옛 남자가 사망한 1904년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동거를 인정받았고, 이미 17살이나 먹은 아들 안토니오를 합법화할 수 있었다.
힘들던 기간을 버텨내고 신나게 부자의 삶을 누리던 엘비라는 1903년 병원에서 휠체어 신세가 된 푸치니의 시중을 들 수수한 16살 소녀 도리아 만프레디(Doria Manfredi 1887~1909)를 고용했다. 패션의 첨단을 달리던 댄디 가이(dandy guy)인 남편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비부인>의 영감에 필요하다며 집에 일본인 소프라노를 데려와 한동안 머무르게 하는 바람에 골치가 아팠던 엘비라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푸치니는 마리아 예리차(Maria Jeritza), 에미 데스틴(Emmy Destinn), 첼시라 페라니(Cesira Ferrani) 및 아리클레 다르클레((Hariclea Darclée)와 같은 유명한 오페라 여가수를 포함하여 외부의 여인들과 빈번한 관계를 만들어 엘비라의 속을 썩여왔다. 가문도 재능도 미모도 없어보이는 도리아는 그래서 가장 만만한 선택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 하녀가 되었지만 도리아는 충실한 성품으로 푸치니를 돌보아 푸치니의 건강이 빠르게 호전될 수 있도록 섬겼다. 이로써 질투심과 과시욕에 물든 엘비라도 그녀를 가족으로 인정했지만, 20대에 들어서면서 성숙한 처녀로 변모해갔다. 도리아에게 친절한 푸치니를 보면서 엘비라의 미묘한 눈길은 의부증으로 변해갔다.
1906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나비부인>의 개막식에 참석하던 중 푸치니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제자인 헝가리인 에르빈 렌드바이(Lendvai)의 누이 블랑케(Blanke)와 사랑에 빠졌다. 블랑케와 푸치니는 1911년 독일의 요제핀 폰 슈탕겔(Josephine von Stangel) 남작부인과 불륜을 시작할 때까지 6년에 걸쳐 연애 편지를 교환했다.
1908년 카이로에서 여름을 보낸 후 푸치니 가족은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의 집으로 돌아왔고 푸치니는 <서부의 아가씨>(Fanciulla del west) 작곡에 전념했다. 엘비라는 6년이나 가족처럼 지냈던 도리아에 대한 근거 없는 의심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고, 결국 도리아를 집에서 쫓아낸 후 매춘부라는 소문을 냈다. 의부증에 빠진 엘비라는 남편의 옷을 입고 남편을 미행하기까지 했으며 이로 인해 푸치니는 집에서 나와 다른 도시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09년 1월 하순 도리아는 결백을 주장하며 독극물을 먹고 자살했고, 부검 결과 도리아는 처녀로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도리아의 결백이 드러나자 만프레디 기족은 엘비라를 5개월 이상의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는 공갈 협박과 무고 혐의로 고소했다. 이 엄청난 스캔들에 힘들어한 푸치니가 장례비를 포함해 거액의 보상금으로 만프레디 가족과 합의해 엘비라는 형의 선고를 피할 수 있었지만 푸치니는 한동안 방향 감각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푸치니 연구자들은 이 사건이 푸치니에게 미친 심리적 영향이 인생 후반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투란도트>에서 자결하는 노예 소녀 류(Liù)와 같은 캐릭터에 반영되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나비부인>의 자살에서도 그 그림자를 볼 수 있다고 한다.
2008년 푸치니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유명한 영화감독 파올로 벤베누티 감독이 <푸치니의 여인>(Puccini e la fanciula)을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도리아는 빌라 푸치니의 방들을 청소하던 중 엘비라와 전남편 사이의 딸인 포스카가 어떤 남자와 침대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크게 당황한다. 유부녀 포스카는 도리아의 입을 막으려고 어머니 엘비라에게 도리아와 푸치니가 불륜관계라고 모함한다. 결국 아무 잘못도 없는 도리아는 엘비라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로 항변한다.
이 영화 개봉 전인 2007년, 이탈리아 피사(Pisa)에 사는 나디아 만프레디(Nadia Manfredi)는 1988년 숨진 자신의 아버지 안토니오가 푸치니의 사생아라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그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문서에는 푸치니가 실제로 도리아의 사촌인 줄리아 만프레디(Giulia Manfredi)와 바람을 피웠다는 정황이 나타났다. 푸치니는 줄리아에게 그녀를 찍은 사진, 영상 클립들을 선물했고, 만프레디가가 사는 동네에서는 이 사실이 소문으로 허다하게 퍼져 있었다고 한다. 이 문서가 나오자 언론은 푸치니가 줄리아의 아들 안토니오를 낳게 했고, 나디아가 푸치니의 손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도리아의 사촌 줄리아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의 이름과 본처 엘비라와의 자식들의 이름이 모두 일치해 의혹은 더욱 커졌다.
나디아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푸치니와 자기 부친의 유전자 검사를 법원에 요청했다. 하지만 현재 유일한 혈육인 푸치니의 의붓손녀 시모네타(Simonetta) 푸치니는 유전자 검사를 거부하는 한편 변호사를 통해 감독에게 영화 속 줄리아와 푸치니가 주고받았던 사진과 편지에 대한 내용을 다룰 수 없도록 법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나디아의 주장이 오페라 거장인 푸치니와 유족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푸치니에게 도리아 스캔들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평생 헌신적인 아내이자 조력자를 만난 레스피기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1879~1936)는 고향이던 볼로냐를 떠나 1913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의 교수가 되면서 로마로 이주했다. 1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16년 어머니가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그는 산속의 종교 휴양소에 가서야 겨우 치유할 수 있었다.
이듬해 다시 음악원으로 복직한 레스피기에게 평생의 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사 올리비에리 산쟈코모(Elsa Olivieri Sangiacomo·1894~1996)는 로마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자랐다. 부모는 딸이 엄청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닫고 어려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가족이 로마로 돌아온 후 엘사는 <시골 기사>의 작곡자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가 이끄는 국립 음악원에 등록했다. 마스카니 역시 그녀의 성공을 확신했다. 엘사는 이곳보다 유명한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다.
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가운데 엘사는 리스트의 제자인 조반니 스감바티(Giovanni Sgambati)의 눈에 띄었고 재능에 감탄한 그는 피아노 레슨을 무료로 해주겠다고 나섰다. 엘사의 데뷔 연주가 러시아 대사관에서 이루어지기로 예정되었는데, 하필이면 오른쪽 팔에 급성 신경염이 발생했다. 당시엔 치료법을 찾지 못해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은 갑작스럽고 잔인하게 중단되고 말았다. 하지만 음악을 계속하고 싶었던 엘사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작곡을 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마침내 음악원에 입학한 엘사는 레미지오 렌치(Remigio Renzi)에게 화성학을 배우면서 메조 소프라노 성악가로서의 재능을 찾아냈다. 그리고 교향시 4부작 ‘로마의 분수’(Fontane di Roma) 발표로 이탈리아 클래식 음악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된 남자에게 작곡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오토리노 레스피기였고, 엘사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다.
처음에 레스피기는 가수와 작곡가, 학자로서 엘사의 재능에 매력을 느꼈고 그쪽 측면에서 접근했지만, 지적, 음악적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15살 연하의 그녀에게 낭만적인 감정이 일어났다. 레스피기는 대개 결혼이라는 말에도 당황했고 친구들 중 아무도 그가 결혼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1919년 초 40살의 레스피기와 25살의 엘사는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이후 엘사는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남편의 예술적 동반자가 되었다. 오토리노와 '작은 목소리'라는 별명을 가진 엘사는 결국 300회가 넘는 콘서트에서 함께 공연했다. 음악학자인 알베르토 가스코(Alberto Gasco)는 그들이 함께 한 첫 공연을 보고 이렇게 평했다.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몇 개월 된 신부인 엘사 올리비에리 산야코모는 가장 결단력 있는 성격을 증명했다. 음악가로서 그녀의 완전한 성공은 확실히 멀지 않다.”
그러나 엘사는 단순히 함께 공연하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와 성악가 듀오의 일원이 아니라 레스피기의 절친한 친구이자 편집자이자 뮤즈이기도 했다. 실제로 엘사는 남편의 작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중에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보통 남편은 글을 쓴 후 나를 작업실로 불러 내 의견을 들었죠. 작곡이었다면 당연히 모든 부분을 다 했을 텐데… 그이는 항상 내 판단을 존중해 줬답니다. 나는 늘 객관적이었고 때로는 그에게 '여기에는 8마디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며칠 후 돌아와 '당신 말이 옳았어요, 엘사'라고 하곤 했죠. 우리는 항상 이런 식으로 함께 일했어요. 우리의 결혼 생활은 완벽한 결합이었고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서로 존중하면서 서로의 취향이나 바람을 방해하려고 하지 않았죠. 이것이 우리가 함께 한 방식이었고 우리는 완전한 행복 속에서 함께 살 운명이었어요.”
1936년 레스피기가 갑자기 사망하자 엘사는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다시 시작해 다수의 독창적인 작품을 작곡하는 것 외에도 고인이 된 남편이 미완성으로 남긴 작품도 완성했다. 남편 사망 몇 달 후, 그녀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에 썼다. "진정으로 그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살고 있어. 죽는 날까지 계속할 거야." 엘사는 남편의 전기를 집필하고 자신의 회고록도 썼다. 1937년 엘사가 완성한 레스피기의 유작 오페라 <루크레치아>(Lucrezia)가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되었고, 레스피기 사망일에 로마 아드리아노 극장(Teatro Adriano)에서 레스피기의 ‘베네데토 마르첼로(Benedetto Marcello)의 칸타타 디도네(Didone) 편곡판’ 초연이 몰리나리(Molinari)의 지휘와 솔리스트 마리아 카닐리아(Maria Caniglia)의 협연으로 진행되었다.
엘사는 남편 사후 60년 동안 그의 작품과 유산을 한결같이 지켰다. 1961년 출판되지 않은 원고 모음을 음악도서관에 기증했고, 1969년에는 레스피기 연구재단(Fondo Ottorino Respighi) 설립을 돕기 위해 베네치아의 치니재단(Fondazione Cini)에 수많은 편지와 사진도 기증했다. 초기 작품의 원고 모음, 개인 물품, 작곡가의 데스 마스크도 고향인 볼로냐 국제 박물관 및 도서관에 기증했다. 1979년 레스피기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의 선두에 선 엘사는 남편의 유산을 "좌파의 정치적 동정심을 지닌 음악적 진보주의자"라고 폄하한 사람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았다. 기념식에서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레스피기의 여러 작품이 처음으로 연주되고 녹음되었다. 엘사는 102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둔 1996년에 사망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