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자(善者), 동양적 미의 세계를 사유하다‘ 작가 이승은  

개인전 '삶의 그 자리에서', 9월 29~10월 5일 갤러리 도스

2021-09-24     심정택 칼럼니스트

십여년 전 중국 여행에 동행했던 필자의 멘토가 귀국 비행기 안에서, ‘집에 간다’는 말에 당황한 적이 있다. 난,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도 가야할 그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 이승은이 작품 속 그려넣는 집은 어디 멀리 여행을 다녀와 마땅히 걸어들어가야 할 집(home)이다. 중국 작가 치바이스(齊白石)의 선경(仙境)이 펼쳐진 곳의 집,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나타난 풍경 속 집이어도 무방하다. 

  <집으로> 장지에 채색 60*32 2021  

이승은의 집은 자신이 믿는 절대자를 제사지내기 위한 성전이기도 하다. 영혼이 쉴 수 있는, 그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곳이다. 동산처럼 보이는 둥그런 듬성듬성 보이는 숲은 사막이나 거친 광야를 거쳐서만 도달할 수 있다. 그 숲이 끝나는 지점에 집이 보인다. 숲과 집의 경계에 있는 정원에 버림받은 영혼인 사악한 뱀이 침입하기도 한다.  

이승은 작가는, 어떻게 하면 엄격한 율법주의에 자유로우면서도 선과 사랑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매일 고민한다. 삶의 일상에 펼쳐진 풍경에서 느낀 감동을 통해 신의 존재를 믿는다. 어느 해 겨울 청명한 날, 동작대교를 지나면서 본 너른 유려한 강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름답고 사랑스런 창조의 질서를 느낄수 있었다. 

 <유혹> 미색 장지에 채색 20*20 2021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동산’은 이승은에게 생태적으로는 목초지에 풀어놓은 양 떼속에서 양털의 촉감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톰 존스가 부른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green green grass of home)' 노래 속 사형수는 형 집행 당일 새벽까지 고향의 잔디밭을 꿈꾼다. 이승은에게 목초지와 (무덤가) 잔디가 예수의 보혈(寶血)일 수도 있는 와인 색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적 사유는 여행에서 만난 눈에 보이는 모든 흘러가는 풍경으로 깊어진다. 종종 꿈결에서나 본듯한 풍경은 자신이 머무는 곳, 반복되는 일상의 어딘가에 언뜻언뜻 비치기도 한다. 비가 갠 어느 날 길가 웅덩이에 하늘이 담겼다. 땅이 있으면 하늘이 있다는 깨달음이 왔다. 스케치를 했고, 작업으로 옮기려했으나 쉽지 않다. 건축적 공간에서의 설치 작업으로도 풀어보려고 한다. 

‘삶’이라는 글자는 박공 지붕의 단출한 세로로 길쭉한 집 모양을 닮았다. 작품 ‘집으로’는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선택된 풍경만 조망하는 개구부(cut-out opening)를 가진다. 작품 ‘광야’에서의 집은 아예 출입문이 없다. 유대계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고 했으나 광야는 여행지가 아닌 것이다. 

 <광야> 공기청정액자에 채색 91*117 2021

집(house)은 터에 자리 잡는다. 터는 무늬를 가지고 있다. 각자의 삶은 궤적을 만든다. 궤적과 무늬가 만난 곳, 머무는 생명체가 한 공간에서 숨을 나누어 마시는 집이 만들어진다. 

이승은의 붓질은 무서울 정도로 절제되어 있다. 큰 화면에 자유로운 듯 보이나 그 화면조차도 터져나갈 듯 그려넣는 작가들과는 다른 행보이다. 덜어내는 행위는 일단 부어넣고 따라내는 행위를 말한다. 이승은은 필요한 만큼의 이미지만을 남긴다. 구체적인 오브제는 넣지 않았다. 공포스러울 정도의 여백은 이 이미지를 강렬하게 한다. 동양화적인 기법은 색을 덜어냄으로써 원근감을 나타낸다.

< Blue town> 미색장지에 채색 45*45 2021

10대 시절부터 허무주의에 경도되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즐거움은 한여름 밤의 꿈과 같고 생은 가을 구름처럼 이내 지난다. 오래된 성채의 허물어진 성벽을 돌로 다듬고 진흙을 다져넣은들 햇볕과 바람, 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머물렀다. 대상과 공간을 보며 시간의 비릿한 냄새를 맡았다.  
그림 속 화자인 작가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투영한다. 늘 부정과 긍정의 경계에 서 있다. 만나고 부딪히는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톨레랑스’, 생각과 행동 방식에 대한 너그러운 존중의 시각을 갖고자 한다. 그럼에도 뭔지모를 분노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관객과 자신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공감대를 찾으려고 애쓴다. 

 <나의 바다> 미색에 장지 수묵채색 41*32 2020

필자는 이승은의 작품을 2년전 여름 처음 보았다. 성긴 날씨처럼 화면 속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대상인 화초처럼 붓질은 밀도를 무시하여 지나간 듯 했고, 색감은 뚜렷하지 않은 중간색 일색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불과 2년여 만에 치밀한 밀도를 뛰어넘은 동양적 미학과 기독교적 사상이 교차한 미니멀한 명징의 세계에 도달해 있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은 작거나 단축을 말하지 않는다. 정수가 담겨있고 절제된 세상이다. 자기만의 어휘를 스스로 찾았다.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 듯 하다. 이승은의 개인전 ‘삶의 그 자리에서’는 서울 삼청동 초입에 있는 갤러리 도스(Gallery DOS)에서 9월 29일부터 10월 5일까지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3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