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로 성공한 푸치니 vs 작곡재능을 인정받은 레스피기
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19 이탈리아 후기낭만의 광휘 '푸치니 & 레스피기' (3)
이탈리아가 서양 역사에서 갖는 위치는 특별하다. 특히 음악 분야에서 이탈리아는 한때 모든 음악의 표준을 만들어내는 곳이었고, 이탈리아의 음악과 음악가는 전 유럽으로 수출(?)됐다. 고전음악 시대를 거치며 주도권을 독일어권으로 넘겨주게 되지만, 서양음악사에서 이탈리아가 갖는 지위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르네상스의 고향 이탈리아였던만큼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 또한 이탈리아가 표준이었다. 음악은 아직 교회음악이 주류였던 시기인데, 특히 성악 음악이 발달했다. 천상계 천사들의 신에 대한 찬양을 지상의 가장 순수한 악기인 목소리로 바꾸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던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조스캥 데프레(Josquin des Prez), 팔레스트리나(Giovanni Pierluigi da Palestrina) 등이 있다. 종교음악인 미사와 모테트, 그리고 다성 합창 음악인 마드리갈 등의 형식이 발전했다. 이들의 다성음악은 성당과 궁정을 타고 전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독일에서는 코랄 등 비교적 쉬운 다성음악이 많이 만들어졌다.
역사학자들이 대체로 바로크시기로 구분하는 1600~1750년은 이탈리아 음악의 황금기였다. 르네상스 시대 음악에서는 아직 신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제는 인문주의가 음악으로도 넘어와 기악이 독립하고 수많은 악기와 새로운 음악형식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찌그러진 진주(baroque)라는 뜻을 가진 바로크 시대 음악은 화려하고 감정적인 표현, 극적인 긴장과 해소, 그리고 장식음 사용이 특징이다.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발상지로서 오페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이탈리아 바로크 작곡가로는 최초의 오페라를 만든 페리(Jacopo Perri) 뿐 아니라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비발디(Antonio Vivaldi), 코렐리(Arcangelo Corelli), 스카를라티(Doménico Scarlatti) 등이 있다.
이 기간 바이올린을 비롯한 비올(viol)족 및 오보에, 플루트 등의 악기들이 확립되었고, 건반악기도 오르간 외 쳄발로를 비롯해 피아노로 가는 길이 정리되고 있었다. 음악형식으로는 오페라 외에도 협주곡, 소나타 등을 포함해 여러 춤곡과 모음곡, 변주곡 등 다양한 기악 형식이 발달했다.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클래식 음악에서 통용되는 형식들의 대다수는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이탈리아 바로크 음악은 화려하고 감성적인 표현으로 유럽 음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잇따른 성공으로 부와 명성을 거머쥔 푸치니
쟈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1858~1924)는 첫 오페라 <요정>(Le Villi)으로 성공을 거둔 후 프랑스 작가 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의 운문극을 바탕으로 한 두 번째 오페라 <에드가>(Edgar)를 1889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줄리오 리코르디(Giulio Ricordi)는 그의 재능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믿고 푸치니를 독일 바이로이트로 보내 바그너의 <마이스터징어>(Meistersinger von Nürnberg)를 보게 했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푸치니는 프랑스 작곡가 마스네(Jules Massenet 1842~1912)의 <마농>(Manon)과 마찬가지로 아베 프레보(Abbé Prévost)의 유명한 18세기 소설을 기반으로 한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를 구상해서 돌아왔다.
35세가 된 푸치니는 <마농 레스코>를 1893년 2월 토리노 레지오 극장(Teatro Regio)에서 초연해 평단과 청중 모두의 열광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영국 등 여러 나라로 수출되면서 리코르디의 혜안을 증명해냈다. 이로써 유부녀 엘비라와의 도피와 가난했던 동거는 끝났고, 1896년의 후속작 <라 보엠>까지 성공했다. 그는 초라한 임대주택을 전전하던 신세를 벗어나 고향 루카에서 조금 떨어진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와 치아트리(Chiatri)에 두 채의 건물을 구입했고, 보스콜룽고 아베토네(Boscolungo Abetone)지역에 별장도 얻었다.
밀라노 음악원 학생 시절과 <마농 레스코> 이전 몇 년 동안 푸치니는 로마에 있는 자선회(Congregazione di caritá)로부터 소액의 지원을 받긴 했으나, 의식주의 비용에 늘 쪼달리는 <라 보엠> 주인공들과 유사한 빈곤을 경험했다. 푸치니는 급전을 위해 종종 자신의 소유물을 전당포에 잡혀야 했다. 웨이클링 드라이(Wakeling Dry)와 유지니오 체키(Eugenio Checchi)와 같은 초기 전기 작가들은 푸치니의 경험과 오페라 사이의 명백한 유사점을 그려냈다. “푸치니가 학생이었을 때 쓴 일기를 보면, 오페라 4막처럼 겨우 청어 한 마리가 4명의 저녁 식사였다.”
사실은 앙리 뮈르제(Henri Murger·1822~1861)의 1851년 작품 <보헤미안들의 삶>(La Vie de Bohème)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를 1893년 초부터 레온카발로(Ruggiero Leoncavallo·1857~1919)도 작곡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레온카발로와 그의 음악출판사는 자신들이 먼저 작곡을 시작했으니 자기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푸치니는 레온카발로의 작곡 착수 사실을 전혀 몰랐다면서 이렇게 제안했다. "그 친구도 작곡하게 하세요. 나도 작곡을 할 테니. 누가 더 좋은 지는 청중이 결정할 것이오." 푸치니의 <라 보엠>은 레온카발로보다 1년 전에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 반면, 레온카발로의 작품은 비교해 보겠다는 호기심에 초연 청중도 많았고 나름의 성공도 거두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라 보엠>은 1896년 토리노 레지오극장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의 지휘로 초연됐다. 몇 년이 채 안 걸려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되면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톱 텐(Top 10)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푸치니가 베리스모(Verismo) 오페라 작곡가냐 아니냐는 논쟁거리중 하나다. 베리스모 오페라는 1890년 마스카니의 <시골 기사>(Cavalleria Rusticana)의 초연으로 시작되어 1900년대 초반에 정점을 이루고 1920년대까지 지속된 스타일이다. 낭만주의가 다루던 역사적, 신화적 주제를 벗어나 당대 하류계층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게 특징이다. <시골기사> 외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Pagliacci), 죠르다노(Umberto Giordano, 1867~1948)의 <안드레아 셰니에>(Andrea Chénier)가 대표작들이다. 푸치니의 활동이 베리스모 운동기간과 일치하다보니 푸치니를 베리스모 작곡가로 보기도 하지만, 그가 베리스모에 동조 내지 일부 참여는 했으나 '순수한' 베리스모 작곡가로 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의 작품 중 <토스카>(Tosca)와 <외투>(Il Tabarro)는 보편적으로 베리스모 오페라로 간주되고 있고, <나비부인>(Madama Butterfly)과 <서부의 아가씨>(Fanciulla del west)가 언급되기도 한다.
오페라로 무리하느라 수면장애를 얻은 레스피기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1879~1936)는 볼로냐 고등음악원에서 연주자 과정뿐 아니라 고급 작곡 과정까지 공부했다. 음악원장 마르투치는 "레스피기는 이제 학생이 아니고 스승이다"라는 말로 그의 연주와 작곡 양면에서의 성취를 높게 평가했다.
지난 세기말, 두 차례 시즌 연주자로 고용되어 갔던 러시아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몇 번의 레슨을 받은 레스피기는 1902년 베를린을 여행하면서 작곡가 막스 브루흐(Max Bruch·1838~1920)로부터도 간단한 수업을 받았다. 레스피기는 뛰어난 연주자로서 돈을 벌었지만, 작곡을 향한 의지도 변함 없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1903~1910년 레스피기의 주요 활동은 볼로냐의 코무날레 극장(Teatro Comunale)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것과 작곡가 무겔리니(Bruno Mugellini)의 실내악 5중주단의 제1바이올리니스트였다. 볼로냐 지역을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시인 네그리(Ada Negri)와 창가리니(Carlo Zangarini)의 시에 작사한 가곡들을 발표했다. 그는 다양한 가수들과 협력했는데, 피노-사비오(Chiarina Fino-Savio)가 여러 곡을 초연했다. 이 시기 작품에 그의 가곡중 가장 잘 알려진 "네비“(Nebbie)가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성악 선율에 대한 감각을 키운 레스피기는 26살 때인 1905년, 첫 오페라인 희극 <엔조 왕>(Re Enzo)을 완성했다. 제자이자 친구인 알베르토 도니니(Alberto Donini)의 대본에 작곡한 <엔조 왕>은 볼로냐의 코르소극장(Teatro del Corso)에서 초연됐다. 하지만 출연진도 거의 음악원 학생 또는 아마추어들이었고, 작곡자 자신도 연장 공연의 의지가 없어 청중의 호응은 제법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공연으로 막을 내렸다. 이 작품은 2004년에야 볼로냐 코무날레 극장에서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1906년에 레스피기는 17세기와 18세기 작곡가들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 선곡한 첫 번째 편곡집을 완성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의 '아리아나의 탄식(Lamento d'Arianna)'을 성악과 관현악 반주로 편곡한 버전은 1908년 베를린 방문 중에 연주돼 작곡가로서 국외에서의 첫 성공을 가져다준 작품이 됐다. 이 두 번째 독일 체류는 헝가리 소프라노 에텔카 게르스터(Etelka Gerster)가 레스피기를 피아노 반주자로 고용하면서 거의 1년 동안 이어졌다. 레스피기는 그녀와 함께 활동하는 기간 그녀의 레슨에도 참여하며 작곡에 응용할 다양한 성악기법들을 마스터할 수 있었다.
베를린 체류 기간에 레스피기는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였던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를 만났다. 그는 레스피기의 몬테베르디 편곡집을 유명한 가수 율리아 쿨프(Julia Culp)를 솔리스트로 세워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에 올렸다. 전기 작가 마이클 웹(Michael Webb)은 이 연주가 몬테베르디 작품들의 재발견에 있어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레스피기는 이전 작품의 추가 편곡집을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는 볼로냐 출신인 몬테베르디의 동료 작곡가 아리오스티(Attilio Ariosti)의 원곡에서 가져온 비올라 다모레와 하프시코드를 위한 두 개의 소나타가 포함됐다. 그렇게 그는 바로크 초기 음악의 재생에도 기여했다.
레스피기가 독일 체류 시절 받은 영향은 그의 두 번째 오페라 <세미라마>(Semirâma)에서 나타났다. 이 작품은 레스피기로서는 첫 번째 전문적인 무대의 도전이었다. 1910년 11월 볼로냐 코무날레 극장에서 초연되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2년 후, 평론가 바스티아넬리(Giannotto Bastianelli)는 이 작품에 대해 레스피기의 스타일이 이탈리아를 휩쓸고 있던 베리스모에서 다소 퇴폐주의(decadentism)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고 평가하면서, 풍부한 다성음악의 기법을 칭찬했다.
하지만 이 오페라 작업으로 인해 레스피기는 기면증을 얻었다. 그는 돈을 아끼기 위해 악보 하나하나를 일일이 자기 손으로 쓰느라 이 증상이 생겼고, 이후 일생 동안 아무데서나 졸고 심지어 잠이 드는 행태를 보여왔다. 기면증은 수면 발작(밤에 충분히 자도 낮에 심하게 졸림), 탈력 발작(감정적으로 흥분할 때 힘이 빠지는 증상), 잠들 때의 환각, 가위눌림 등 네 가지의 특징적인 증상을 보이는 수면 장애의 일종이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