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마지막 기회가 흘러간다
예고된 채상병 특검법 거부권…재의 여부 관건 국민의힘 당심도 尹 거스르기 시작 국민의힘, 尹과 결별 각오하고 변화 이끌어내야
지난 주, 윤석열 대통령은 국정 기조를 되살릴 결정적인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영수회담에서 협치에 대한 실낱같은 시민들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국민의힘도 총선 민의를 받들지 못하고 있다. 총선에서 처참히 패한 지 보름 남짓만에 친(親)윤석열 인사로 세우려는 관성이 되살아났다. 야당은 채상병 특검법 단독 통과로 맞대응했다. 21대 국회 마지막 한 달, 윤 대통령은 정권의 운명을 가를 최후의 순간으로 다가가고 있다.
윤 대통령이 영수회담에서 보여준 것은 결국 ‘윤석열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총선 참패에 놀라 700여일만에 야당 대표를 만나자고 해놓고 자기 변명만 늘어놓았다.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해놓고, 협치는 시도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 대표가 회담 모두에 15분간 쓴소리를 했어도, 정치 복원을 결심했다면 협치에 대한 일말의 불씨는 살렸어야 했다. 윤 대통령이 말과 다른 행동을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시민들이 느낀 실망의 강도는 다른 것 같다.
윤 대통령은 또 스스로 폐지한 민정수석실을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당선인 시절 검찰 등 사정기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을 뒤집으려는 것이다. 수석을 검사장 출신에서 고르고 있다. 민심을 더 잘 들으려고 민정수석실을 부활한다는 말은 명분일뿐, 실제론 김건희 특검 등 야당의 공세에 대응하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장악력이 떨어질 수 있는 검찰을 다잡으려는 게 본뜻이다. 진정 민의를 수용하고자 한다면 시민사회수석실 개편이나 기자회견 정례화, 야당 인사들과 회동 등 방법이 많은데 엉뚱한 해법을 내놓고 있다. 민심에 고개를 숙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지도자는 일찍이 없었다. 민심의 경고를 귓등으로 흘린 윤 대통령을 향한 분노가 어떻게 분출할 지 알 수 없다.
여당도 정신을 못 차리기는 매한가지다. 총선에 대패하고도 혁신형이 아닌 관리형 비대위원장을 뽑기로 한 것 자체가 이를 방증한다. 총선에서만 내리 3연패하고, 최근 두 선거에선 민주당에 과반은 물론 개헌 저지선을 겨우 지키는 정도로 참패한 당의 인식이라고 믿기 어렵다. 이러니 비대위원장을 맡을 사람이 나서지 않아 은퇴한 황우여 전 의원을 겨우 뽑는 상황이 이상할 게 없다. 여당 위기의 본질은 새로운 비전과 가치의 부재에서 오고 있는데 해법은 너무나 안이하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국민의힘은 절반은 보수 정당, 나머지 절반은 무이념 정당에 가깝다”면서 ‘국민의힘이 보수 정당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라고 했다. 보수당이 뿌리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땜질식 대처만 내놓고 있다는 얘기다. 당의 실질적인 대표인 대통령이 변하지 않는데 당이 변할 리 만무하다. 방향은 옳은데 소통에 서툴렀을 뿐이라고 하니 크게 고칠 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순이 극에 달하면 새로운 기운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민심과 당심이 본격적으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참다 못한 야당이 2일 채상병 특검법을 통과시켰다. 67%에 이르는 채상병 특검법에 대한 여론의 지지(반대 19%)를 등에 업은 것이다. 대통령실은 협치를 저버리는 나쁜 정치라고 비판했지만, 그런 주장은 더 이상 먹힐 리 없다. 모든 정황은 대통령실의 해병대 수사 개입을 강력히 의심케 한다.
주목할 것은 여당 내 움직임이다. 총선 당시 인재영입위원장으로 총선 패배에 책임을 져도 시원치 않을 ‘찐윤’ 이철규 의원이 원내대표를 하겠다고 나서자 당 안팎에서 불출마를 압박했고, 결국 원내대표 선출은 연기됐다. 당심이 참다 못해 드디어 윤심에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5월 김대중 대통령도 세 아들의 비리 연루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어쩔 수 없이 탈당했다. 그리고 그 해 치러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결국 여권의 변화는 당이 나서 만드는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이 끝내 변하지 않는다면, 그와 헤어질 결심까지 하는 수준으로 각성해야 당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채상병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다. 거부권이 행사되고 재의에 부쳐질 경우, 여당에서 18석의 이탈표가 있어야 한다. 재의가 쉽지는 않겠지만, 당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윤 대통령이 주창한 공정과 상식, 법치는 이제 누구도 믿지 않는다. 당심도 그를 거스르기 시작했다. 윤 대통령이 이르면 다음주 기자회견을 연다고 한다. 이 회견이 윤 대통령에게는 쇄신의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기회를 다 놓친 후 혁신하겠다는 말, 협치를 한다는 약속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중근은 경향신문에서 34년 동안 기자로 일하고, 2024년 퇴직했다. 편집국에서 정치(정당·외교안보·총리실·중앙선관위·청와대), 사회(경찰·검찰), 국제부를 거친 뒤 논설실장·논설주간으로 경향신문의 논평을 책임졌다. 국가의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되고 집행되는지를 관찰한 것을 소중한 경험으로 여긴다. 글의 무거움을 절감하며 정파적 보도를 지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하자’는 게 '신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