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모(Bayamo)의 이발소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런 목적지가 있다” - 마르틴 부버
대지에 순응한 풍경은 영감의 원천
아바나로부터 벗어나 쿠바 동부로 가는 길. 겹겹이 쌓인 언덕길을 지나며 사람들을 만나고 길을 물었다. 말을 탄 농부가 소나기와 번개 사이에서 노래를 부르며 낡은 다리를 건너고, 들과 들을 잇는 무지개를 따라 소떼들이 마을을 지났다. 그 쇠락한 길을 따라 펼쳐진 남루한 풍경 속에서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일이란 애초부터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여행은 누군가의 일상을 무작정 동경하거나 욕망의 크기를 자위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온 뒤에야 완결되고 또다시 미완의 기억으로 묻어두는 일이다.
달콤한 사탕수수의 대지. 쿠바의 남동부 바야모(Byamo)의 평온한 일상이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라 바야메사’(La Bayamesa)*의 첫 소절을 장식한 이 곳의 억센 사나이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노동과 자유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지켜내고 다시 대지에 순응한 마을 풍경이란 인간에게 있어 누대에 걸친 영감의 원천이다. 노배우의 유장한 독백이 울려 퍼지는 정극(正劇)의 한 장면처럼, 유려한 손동작으로 이발하는 몸짓조차 드라마가 되는 무대 같은 이발소를 만나는 일. 해질녘 막을 내린 바야모의 이발소는 한 잔의 커피와 한 모금의 럼으로 또 다시 내일을 예비해둘 것이다. 음악과 살사, 럼과 담배와 카리브의 에메랄드 해변이 아니라 고된 노동과 오랜 식민의 기억으로 꽃이 피는 쿠바 동부의 들녘에서, 혹은 따가운 햇볕이 쏟아지는 무료한 바야모의 국영민박집(Casa Particular) 흔들의자에서 삶의 영감을 얻었다면 쿠바는 바로 그곳에 있다. 거창한 혁명과 체(Che)와 피델(Fidel)이 아니어도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많은 가치를 서둘러 용도 폐기한 것은 지금의 탐욕 때문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소박하고 조용히 빛나는 저 일상의 작은 영감과 염치를 잊은 대가로 지난 왕조와 지옥의 이름을 함께 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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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의 국가(國歌) -Al combate, corred, Bayameses, Que la Patria os contempla orgullosa; No temáis una muerte gloriosa, Que morir por la Patria es vivir. 바야모의 사나이들이여, 전투에 서두르라, 조국이 그대를 자랑스럽게 보고 있도다. 그대여 영광스러운 죽음을 두려워 말라. 그 이유는 희생이 조국을 살릴지니.
손문상은 <미디어오늘>에 시사만화를 그렸다. 한국일보에 4컷 만화 <강다리>, 동아일보에 〈동아희평〉, 부산일보와 프레시안에 만평 <손문상의 그림세상>을 연재했다. 2004년 이라크를 다녀와서 <그림으로 남긴 이라크-바그다드를 흐르다>를 냈다. <그림 만인보>로 2003년 ‘민주언론상’을 수상했고, 2015년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 물대포를 맞아 쓰러지면서 사망한 현장을 근접 촬영해 ‘이달의 기자상’을 탔다. 지금은 부산 흰여울마을 바닷가 독립서점 <손목서가>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