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전쟁 자체의 참혹성 고발

피카소 전시, '신화 속으로 ' ‘불의에 분노, 인간에 대한 연민’

2021-06-24     심정택 칼럼니스트

고바위의 오르막 골목길, 발목에 차인 빗물은 양 방향으로 갈래를 낸다. 선 자리에 따라 빗물의 흐름이 바뀐다. 삶의 선 자리에서도 선을 악으로 바꾸는 이가 있고, 악을 선으로 바꾸는 이가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또한 이와 관련이 깊다. 타인을 대하는 고정관념과 선입견,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은 발목에 찬 빗물의 물성과도 같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

위대한 예술가는 고정관념, 선입견을 엎어버린다. 헛된 비전을 말하지 않는다. 부정의에 분노하며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가진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 1973)가 프랑스 남부 발로리스에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1951>은 폭력에 대한 분노와 약한 자들에 대한 연민의 표현이다.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합판에 유화. 110×210 © 2021-Sucession Pablo Picasso -SACK (Korea)

황폐하고 시간을 알 수 없는 풍경,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을법하지만 흔하지는 않은 강제로 벌거벗겨진듯한 여성들과 아이들, 절반은 중세 시대의 기사이고 절반은 로봇의 형상을 한 군인들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전쟁 공포의 고발을 주제로 삼았다.

이번 전시의 프랑스쪽 전시 커미셔너인 요안 포플라르은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피카소가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특정 전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 피카소의 단어를 차용하자면 바로 ‘잔혹성’이었다. 작품이 담긴 주제에는 겉으로 보이는 사실적 요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투쟁의 에너지와 체제 전복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 완성되고 나서 몇 년 뒤인 1956년, 이 작품의 복제본이 바르샤바에서 전시되어 구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판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그 예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1년이다. ‘한국’ 이름이 붙은 이 작품은 참혹할 수 밖에 없는 전쟁은 어떤 이유로든 당대는 물론이고 미래 세대에도 일어나서는 안된다는걸 일깨운다.

이 땅에서 위대한 예술가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동시대의 작가들은 홍콩, 미얀마, 팔레스타인 등 지역에서의 숱한 비극을 접하면서도 인간이 행하는 폭력에 대한 분노, 약자들에 대한 연민을 표현않는다. 왜 그리 되었을까?

예술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천민 자본주의 체제로 전락해 버렸다. 공정과 불평등에 대한 공감을 잃어버렸으니 자신과 상관없는 국제적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대부분 오로지 심장과 격리된 손 끝 재주만으로 대형 이벤트에 딸려나오는 굿즈와도 같은 소비 상품만을 만들 뿐이다. 역사가 짧은 한국 현대 미술에서 중요 작가들은 전란의 한가운데서 대부분 병들고 가난했다. 동시대 작가들은 다른 형태의 전란에 매몰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전통적 구상주의 미술 고수

전시 작품들은 피카소가 창조한 형태와 실제 경험이 반영되었다. 연인에 대한 애정, 남자의 의심, 아버지로서 느끼는 기쁨, 현실 참여 등.

피에로 복장의 폴. 1925. 캔버스에 유화. 130×97 © 2021-Sucession Pablo Picasso -SACK (Korea)

피카소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발레단의 무용수 출신 올가 코클로바(1891-1955)와 1918년 7월 첫 결혼식을 올린다. 올가와 살면서 피카소는 1910년대를 전후한 입체주의 양식에서 벗어나 얼굴과 신체를 보이는대로 그린 ‘신고전주의 시대’를 연다. 1921년, 피카소의 사후에 발견된 <편지읽기>(1921)는 그의 절친으로 1차 대전 중 사망한 기욤 아폴리네르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피카소는 올가와의 사이에서 아들 폴 (paul 1921-1975)을 얻었다. <피에로 복장의 폴>(1925)을 보면서 이를 그린 화가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카소의 작업은 이무렵 입체주의 양식에서 벗어나 앵그르풍의 전통적 구상회화로 전환하는 시기로, 입체주의와 고전주의의 상반된 두 경향이 공존한다.

염소는 피카소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이다. 작품 <염소. La Chèvre. 1950. 청동>는 아상블라주(assemblage)로 제작된 작품을 주물을 떠서 청동으로 만들었다. 임신한 염소의 배 모양, 생식기 등의 면면은 피카소가 여전히 사실주의 미술의 정점에 있다는걸 보여준다. 도자기 작품은 그의 재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인해 조각과의 경계를 허무는 경지에 이른다.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이름을 딴 <볼라르 연작 suite Vollard>은 1930년 9월부터 1937년 3월 사이에 제작된 에칭 작품 100점중 일부가 선보인다. 연작 판화 작품은 균형의 끊임없는 파괴와 구성의 겹침과 변형의 특징이 고스란히 나타난 데생 작품들을 동판에 에칭 기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테레즈 발테르(1909~1977)는 피카소의 연인이자 뮤즈로 1930년대 전반기 중요한 모델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다. <테레즈의 초상. 1937>은 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명암의 대비 효과 없이 색채만으로 인물에 볼륨감을 주었다.

마리 테레즈의 초상. 1937. 캔버스에 유화. 100×81 © 2021-Sucession Pablo Picasso-SACK (Korea)

코로나 팬데믹에 기억될 전시

딱 미술 교과서 눈높이의 관객들은 충격을 받는다. 자신들이 알던 피카소는 전시장에서 본 피카소의 10%도 안된다는 사실에.

10년전 갤러리를 경영할 때이다. 150호짜리 말이 주인공인 구상 작품을 전시 한 달간 매일 대면했다. 관람 시간이 지난 뒤, 혼자서 그 그림을 마주했다. 보름쯤 지나니 그 말이 최소 몇 십 센티는 걸어서 움직인 듯 보였다.

관람객은 특정 작품 앞에서 2~3분, 길어야 5~6분을 머문다. 일생에 단 한 번. 이미지는 강렬하다. 작품은 물리적으로 분리되지만 그 몇 분이 인생 내내 그 관람객에게 회화적 이미지로, 또는 작품이 걸린 공간의 아우라와 함께 체내 깊숙히 가라앉기도 한다.

많은 작가들에게 전시 초대권과 입장권을 우편으로 보냈다. 일반 관람객들과 그들이 느끼는 피카소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들을 초대한 이유는 작가로서의 자극을 받기를 바래서이다.

르네상스를 이끈 문명 도시는 이탈리아 피렌체이다. 르네상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배출했다. 피카소는 이 르네상스와 이후의 근세와 근대를 엎어버린 인물이다. 그는 세상을 떠난지 불과 48년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 세대가 모두 사라져도 그의 이야기는 작품과 함께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2021년 코로나팬데믹이 뉴노멀이 된 시절의 서울 전시, ‘신화 속으로’는 미래 세대에도 주요한 피카소 전시의 아카이브로 남을 것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년~ 1750)가 라이프치히의 교회음악을 책임지는 칸토르 재직 시에는 중세의 페스트와 30년이나 이어졌던 종교전쟁의 상처가 채 낫지 않았던 시기였다.

26년여전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 다시 파리를 방문한다는 속설을 믿고 노트르담 성당 앞 경도와 위도가 일치하는 지표를 힘껏 밟았다. 이후 파리를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재난의 시대, 파리가 서울로 왔다. 전시는 예술의전당에서 2021년 8. 29일까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