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시간을 찾아가는 서양화가 장희진
1936년생인 재불(在佛) 화가 김기린씨가 지난 1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한국 단색화(單色化)의 선구적 작가로 손꼽힌다. 서양화가 장희진의 외할아버지이다.
김기린은 1970년대부터 단색 혹은 두가지 색으로 사각형 안의 사각형을 그려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연작 등을 발표하며 색채 연구를 심화했다. 화면에 수많은 작은 단위의 상자를 만들고 그 속에 무수한 색점들을 찍어 완성되는 그의 작품은 구조로서의 깊이와 평면으로서의 넓이를 동시에 보여준다.
장희진은 생물학적 DNA가 아닌 선배 작가인 김기린의 구조와 평면에 대한 사유와 테크닉으로부터 영향받은바 큰 것으로 보인다. 색종이를 접었다 펼치면 나타나는 선들과 균열로 인해 평면은 나뉘어진다. 선에 의한 분할은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스럽다. 장희진의 시그니쳐는 모델링 페이스트를 규칙적으로 쌓아올려 만들어진 요철 표면, 마띠에르이다. 장희진은 대상이 구현되는 과정에서의 자연스런 마띠에르가 아니라, 대상을 구현해 넣기 위한 기초로서 요철 표면을 필요로 한다.
미술 사조로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와 그 뒤에 이은 팝아트에 대한 반동으로 1960년대 전반부터 1970년대 초에 걸쳐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미니멀리즘의 엄격하고 간결하며 소극적인 화면 구성을 추구한다.
‘가령 사람이 안고 있는 붉은 장미 다발을 표현해야 되는데, 묽은 레드가 없어 무거운 레드를 겹쳐서 쓸 수 밖에 없었다.’라고 예를 들면서, 적합한 색을 찾아내는 과정이 어떤지를 물었다.
‘색은 직관적으로 만들어진다. 스스로 당황할 때가 많다. 감각적으로 혼합하다보니. 한 화면에서 나오는 색들이 조화롭고 서로를 빛나게 해줄 수 있도록, 무아지경으로 만든다.(혼합한다)’
장희진은 요리하듯이 감각적으로 색을 만든다. 붓질 이전의 색의 선택은 일상적 서사를 담기보다 감성을 시각적으로 변환하는 선택적 행위이기에 중요하다. 최근 전시의 타이틀이 ‘네버 휴 엔딩’(Never Hue Ending)이었다. hue(색조)는 강한 에고의 작가라기보다 조화로움에 의미를 두고 싶어 선택했다.
색조를 중심에 놓은 장희진의 색면 회화(色面繪畵, Color-Field Painting)는 1950~196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것과는 다르다. 당시의 대형 화면에 삼차원적인 깊숙한 공간감을 주는 착시적 효과와 제스처적인 붓질을 피하고 화면 위에 물감을 넓게 펴발라 캔버스 전체를 색채로 뒤덮었다.
장희진 작품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현대 미술사를 들춰야 했다. 바우하우스 학생이자 교사 출신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 1888~1976)는 1950년부터 25년 동안 <사각형에 대한 경의> 연작을 통해 색채의 상호 작용을 연구했다.
서로 색채가 다른 정사각형 서너 개가 중첩된 '정사각형에 바치는 경의' 수백 점을 그렸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화면이지만, 색채의 변주를 통해 눈을 혼란케 하는 입체감과 움직임을 만들어 낸 것. 3개 또는 4개의 정사각형이 서로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는 다양한 색상은 측정 모양보다는 음영간의 대비에 중점을 둔다.
‘50명에게 빨간색을 떠올리라고 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나타난 색깔은 전부 다른 색일 것이다.’ 요제프 알베르스는 <색의 상호작용>에서 ‘같은 색도 채도·명도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라며 그 이유를 적었다. 개인의 상상력과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색의 폭이 넓어진다는 얘기다.
장희진 작품의 본질은 예술고와 미대를 다니기 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역시 작가인 남편의 활동을 지원하면서 자신의 작품 활동도 놓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쓴 그 훨씬 이전의 과정에 있음을 짐작했다.
어머니는 김기린의 슬하에서 프랑스에서 살고 공부했으며, 서울 명동에 의상실을 크게 차린 유명 디자이너이다. 어린 장희진은 동대문 새벽 시장을 따라다니며 원단 조각을 주어 인형 옷을 만들기도 했다. 한복에도 새롭게 눈을 뜨게 된 건 결혼하고서이다. 시어머니가 전주에서 한복집을 했다. 한복 원단의 핵심 디자인은 색감 자체이다. 원단을 선택하고 패턴을 뜨고 재단하여 옷을 짓는 과정은 되레 부수적이다.
그녀의 회화는 의상 디자이너 딸이 무의식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공간과 형태의 실루엣을 감싸고 인간의 체취마저 느껴지는 웃음 소리 들리는 분주하고 행복했던 시간과 시절의 색채가 본질이다.
장희진은 시간을 형태를 입혀 색으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10여년전 처음 작품을 보았을 때, 한여름 담장 너머 등나무 그늘이 마당 안 평상에 펼쳐진 듯 보였다. 그 나뭇잎 그림자는 담장 안쪽 수돗가 대형 뻘건 플라스틱 함지박 통에 띄워놓은 수박의 줄무늬와 겹쳤다. 통 바깥으로 흘러넘치는 물 색을 띠기도 했다.
살아있는 이들은 이메일이나 SNS로 드러내 문자나 이미지로 자신을 저장시키며 선택되어지기를 바란다. 세상을 떠난 이들은 남아있는 이의 기억 및 추억 속에서, 가끔은 향기로운 와인의 상쾌한 물성 및 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공간을 아우르는 화가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감각과 사고의 체계, 무의식 너머를 찾아내 온 몸으로 그린다.
글이 길을 잃고 헤맬 때 스스로가 길을 찾아간다고 믿는다. 외할아버지 고(故) 김기린 선생님의 영혼이 손녀의 예술 세계 일부를 필자에게 전해준듯하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3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