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에 참여했던 궁녀 고대수의 목숨 건 항거
갑신정변 실패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창경궁의 폭음, 갑신정변의 서막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늦은 밤 9시에 연회가 한창인 우정총국 옆 민가에서 불이 올랐다. 초가 지붕에 난 불은 옆집으로 옮겨붙으며 대규모 화재로 번지기 직전이었다. 근대 우편제도를 새로 실시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종로 거리에 우정총국을 건립하고 그 날 기념행사와 연회를 하던 조정 대신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을 느꼈다.
연회의 주관자인 홍영식은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었고, 홍영식과 함께 개화파의 일원이었던 김옥균은 연회 내내 들락날락 하였다. 김옥균의 이상한 행동에 수상함을 느낌 민영익은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연회장을 나왔다가 자객의 칼을 맞고 연회장으로 도피하였다. 온몸을 칼로 난자당해 피로 뒤범벅이된 민영익을 보고 조정 대신들과 연회를 축하하기 위해 온 외국 공사 그리고 외국 선교사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도망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멀리서 폭음이 들렸다. 그 폭음이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연회 참가자들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동궐(東闕)인 창경궁이었다. 국왕이 거처하고 있는 동궐에서의 폭음 소리에 모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생각했다. 역모가 발생했다고.
갑신년(甲申年) 혁명이 될뻔한 정변(政變)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일러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 한다.
고대수, 갑신정변에 뛰어들다
‘갑신정변’을 역사적으로 평가할 때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김옥균 등 정변의 주체들이 일본과 연대하여 친일적 행위가 있어서 실패하였다고 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갑신정변이 나름 젊은 사대부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변화시키고 근대화의 길로 가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젊은 사대부 관료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성들이었다.
당시 고종과 민왕후가 청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김옥균 등의 세력들이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였을 때 청나라 군대가 개입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김옥균 등의 개혁당 세력을 공격하고 이들을 반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지, 백성들의 반대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백성들은 정변의 주체 세력들의 대부분이 귀족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귀족들이 상당한 친일파라고 생각했다. 백성들은 조선 건국 이후부터 왜구들의 침입으로 일본이라면 치를 떨고 있었다. 더구나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강압이 시작되면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이런 현실에서 친일파들이 권력을 잡겠다고 정변을 일으켰다고 생각한 백성들은 정변 주체자들을 공격하게 된 것이다.
실제 갑신정변은 일본 공사의 은밀한 지원과 일본 본토 정한론자(征韓論者)들의 지원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젊은 귀족들이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게 해서 근대화란 이름으로 조선의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조선에 대해 종주국 행세를 해오던 청나라의 자리를 일본이 꿰차려했던 것이다. 그러니 백성들이 아무리 김옥균이 훌륭하고, 박영효가 철종의 부마이고, 홍영식이 명문 거족의 자제였다 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변의 참여자중에서 일본과 전혀 친하지도 않고, 조정의 고위 관료도 아니고, 명문거족의 자제도 아니고, 더군다나 남자도 아닌 여인의 몸으로 이 엄청난 거사에 참여한 이가 있었다. 그것도 왕비의 밀접 경호원 역할을 맡았던 궁녀가 말이다. 이 궁녀가 바로 고대수(顧大嫂)라는 별칭으로 불린 궁녀 이우석(李禹石)이다.
이우석, 고대수란 어떤 여인인가
이우석, 즉 고대수는 몸집이 아주 대단했다. 김옥균의 《갑신일록》에는 엄청난 거구의 여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2m가 넘는 장신일 것이다. 당시 조선 남성들의 평균 신장이 대략 5척(尺)으로 요즘으로 치면 150cm 정도이다. 그러니 당대 사회에서 이우석은 엄청난 거구였다. 단지 키만 큰 것이 아니라 몸집도 상당했다. 몸무게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150kg 이상이 되었을 것이다. 엄청난 거구에다 힘도 장사였다. 남성들 4~5명은 거뜬히 해치울 수 있었다. 이런 정도의 여인은 당시 존재하기 힘들었다.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괴물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우석(고대수)은 어린 시절부터 괴물 취급을 받았다.
이우석은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 42세라고 하였다. 김옥균의 증언이다. 그렇다면 1843년생이다. 당시 나이 42세면 한창 장년의 나이다. 조선의 평균 수명이 39세이니 이우석은 평균 나이보다 조금 더 산 편이다. 그러니 그녀는 삶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삶이 타인들에 의해 괴물로 취급받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왕비를 모시는 호위 궁녀였음에도 왕조를 뒤집으려 하는 거사에 참여한 것이다.
기괴한 고대수, 궁궐이 액막이가 되다
고대수가 어느 지역 출신인지는 기록에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다만 태어날 때부터 컸다고 하니 그녀는 어린 시절에도 유달리 몸이 컸을 것이다. 이렇게 큰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관아에 보고가 되고, 관아는 각 도의 감영으로 보고하고, 다시 관찰사가 있는 감영에서는 조정에 보고를 한다.
타고난 힘을 갖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들이 존재하면 반드시 한양의 조정까지 보고가 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혹시라도 그 아이가 성장을 하여 역모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군사들을 보내 소년 장사의 발목을 꺽거나, 다리를 부질러 불구가 되게 만든다.
이런 일 때문에 옛날 설화에 ‘아기 장수’의 슬픈 이야기가 많다. 어깨죽지에 날개가 있는 아기장수들은 모두가 한양에서 내려온 군사들에 의해 허리가 꺾여 죽었다는 것이다. 뛰어난 힘을 가진 장수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힘이 있으면 무조건 죽이거나 불구를 만들어 자신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조선의 사대부이고 기득권들이었다. 그러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수많은 왜구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한 건 다 기득권들의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비겁하고 못난 행동 때문이다.
비범한 남자아이들은 이처럼 가혹하게 처리하였지만 이우석은 다행히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죽일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우석 역시 특이한 신체를 가진 기괴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조정에 보고가 되었고, 이우석은 궁중의 액막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보통 이상으로 덩치가 큰 아이가 태어나면 궁궐의 불길한 기운을 막는 액막이로 활용한다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이우석을 액막이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 이우석은 액막이로 들어갔다가 대궐안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무수리가 되었다.
무수리 고대수
일반적으로 무수리는 정식 나인이 아니기 때문에 한양 도성안에 사는 유부녀들을 기용하여 물을 길어오게 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물긷는 아르바이트를 시키는 것이다. 하루종일 물을 길어 나르는 무수리도 존재하지만, 대다수의 무수리들은 대궐 밖에서 출퇴근을 하였다. 그러나 이우석은 궁안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하급 궁녀로서 무수리 역할을 한 것이다.
이때 이우석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무수리는 궁녀중에서 천민에 해당되는 신분이다. 궁녀가 종9품에서 정5품 상궁까지 여러 직급이 있고, 임금을 모시는 지밀상궁에서부터 빨래를 하는 세답방 궁녀들까지 있지만, 이들 모두는 정식 궁녀였다. 이들 궁녀는 상당한 녹봉을 받으며 재정적 안정을 이룰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수리는 정식 궁녀도 아니어서 복장도 검은색 옷을 입고, 녹봉도 형편없고 더구나 인격적 모독까지 받는 일이 허다했다. 신체적 이상과 함께 무수리로 손가락질을 받는 모독을 그녀는 꾹 참고 살아야 했다. 당시 궁녀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우석이 검은색 무수리 옷을 입고 나타나면 어린 궁녀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이럴 때 이우석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런 불행한 처지의 이우석에게 ‘고대수’란 또 다른 이름이 생겼다. ‘고대수’란 수호지에 나오는 108두령 중 한명의 이름이다. 무예가 능통하고 힘이 장사인 여자 두령의 이름이 ‘고대수’였다. 그래서 거구의 이우석을 놀리기 위해 궁녀들이 고대수란 이름을 만들었고, 궁중안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놀림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민왕후의 호위 궁녀가 되다
무수리로 일하던 이우석은 뜻밖에 고종의 왕비인 민왕후(훗날 명성황후라 불린다)의 눈에 띄었다. 거구에다 타고난 힘이 있는 이우석을 자신을 호위하는 궁녀로 발탁했다. 늘상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민왕후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내시와 궁녀가 필요했다. 뛰어난 무예를 갖춘 군인들이 호위할 수 있겠지만 왕후의 은밀한 공간에 호위를 위해 남성들을 들일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엄청난 괴력을 가진 궁녀가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이다. 이우석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민왕후의 호위 궁녀로 발탁된 이우석은 이때부터 이우석이란 원래의 이름보다 ‘고대수’란 별호로 더 많이 사용된 듯 하다.
자! 이제부터 이우석의 이름을 고대수라 부르자. 고대수는 민왕후의 호위 궁녀가 되고 난 이후 그녀를 정말 열심히 보필했다. 어린 궁녀부터 상궁들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멸시하고 조롱하였는데, 민왕후의 호위 궁녀로 전격 발탁되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왕후 옆에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 고대수의 위상은 엄청나게 올라갔다.
고대수의 충성심과 헌신에 민왕후도 총애를 하였다. 그녀에게 어떤 대우를 하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갑신일록》에 왕비의 총애를 받아 늘 가까이 모시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 그녀가 김옥균 등 개화파와 함께 정변(政變)의 참여자가 된 것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김옥균, 박영효 등이 국왕인 고종을 중심으로 정치를 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상 국가의 권력은 정변 주체자들과 일본의 요인들이 가지게 될 것임을 뻔히 아는 고대수가 왜 왕후를 배신하고 정변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고대수 김옥균과 만나다
김옥균이 고대수를 만난 것은 1874년이다.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10년 전이다. 이때는 개화파들이 서로간에 동지를 모으는 시기였다. 김옥균이 22세 때인 1872년 2월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를 하고, 2년 뒤인 1874년 2월에 홍문관 교리로 임명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조정에 나간 신진 관료 김옥균은 궁중안에 있는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김옥균은 당대 영향력이 아직도 남아있던 안동김씨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장차 조정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고종의 총애도 대단했다. 일본에 일찍 유학을 하고 와서 신문물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그가 일본에서 만난 후쿠자와 유키치는 동양평화론을 이야기 하지만 실제는 정한론자였다. 그는 김옥균을 유심히 보고 김옥균이 장차 조선의 중심 인물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그에게 개화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을 역설하였고, 김옥균은 이 말에 감동받았다. 이때부터 김옥균은 일본에 대한 동경과 친일의 길로 나가게 된 것이다.
김옥균이 조선으로 돌아와 개화파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국왕과 왕비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요즘 같으면 도청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당시엔 도청기를 설치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대신 국왕과 왕비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는 사람을 포섭하는 것이 필요했다. 김옥균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고대수였다.
김옥균이 고대수에게 어떻게 접근해서 그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신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거구의 여인에게 김옥균은 환한 미소와 자상한 얼굴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어느 남성 관료로부터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던 고대수가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젊은 관료인 김옥균에게 사람으로 대우를 받으니 단숨에 넘어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고대수는 개화당과 함께 하기로 하고 국왕과 왕비의 비밀스런 대화를 김옥균에게 알려주기 시작했다. 김옥균은 여기에 더해 고대수에게 일본에서 가져온 화약(火藥)을 비밀리에 주었다. 정변을 치루는 날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진짜 세계 첩보사에 남을 특별한 공작원이 탄생한 것이다.
고종을 잠들게 하는 환관 모군의 비책
당시 고종은 매우 특이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는 것이다. 낮에는 잠을 자고 해가 지면 일어나 밤에 일을 한다. 그래서 조정의 관료들도 모두 밤에 출근을 하고 낮에는 집에서 잠을 자야했다.
고종은 특히 밤에 하는 연회(宴會)를 좋아했다. 밤새 불을 켜고 술을 마시는 연회를 즐기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연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매관매직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종과 민왕후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상당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고종이 밤에 눈을 멀쩡하게 뜨고 일을 한다는 것이다. 김옥균과 함께 정변을 준비하는 이들은 낮에 거사를 치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낮에 국왕은 잠을 자고 있지만 대부분의 궁중 관료와 군인들 그리고 백성들은 모두 낮에 궁궐안에서 정상적인 업무를 하고 있기에 환한 대낮에 정변을 일으킬 수는 일이었다.
김옥균은 반드시 밤에 새로 건립한 우정국에 불을 질러 고종과 왕후가 창덕궁이 위험한 것으로 판단하게 하여 창덕궁 옆 작은 별궁인 경우궁(景祐宮)으로 가게 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동궐인 창덕궁과 함께 있는 창경궁 안의 ‘통명전(通明殿)’에서 화약을 폭발하게 해야 했다. ‘통명전’은 원래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거처였으나 그녀가 죽은 이후 왕비나 세자빈이 거의 가지 않았다. 통명전은 고종대 내내 비어있었다. 김옥균은 그곳에 고대수로 하여금 폭탄을 설치하여 폭발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밤에 일하는 고종으로 인해 조정 관료들이 모두 밤에 경복궁에 정상적으로 출근하여 업무를 하고 있으니 창경궁 안에 화약을 터뜨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조건 고종이 일찍 잠을 자서 관료들이 퇴근을 하게 해야 하고, 이때 우정국을 폭발시켜 나라에 큰 변고가 있는 것처럼 해야 했다.
그래서 김옥균은 묘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환관 모군(某君)이 좋은 꾀를 내었다. <갑신일록>에 의하면 고종이 거사 당일만 초저녁에 잠이 들게 하는 좋은 계책을 모군이 내었다고 했다. 환관 모군은 승정원에 쌓아둔 문서들을 고종이 잠을 자기 전 아침에 가져와서 낮에 처리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고종이 일을 하느라 아침부터 잠을 잘 수 없게 되고 그 일을 마무리 한 이후 초저녁에 잠을 자게 할 것이라고 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젊은 환관의 제안은 성공했다.
실제 고종은 거사 당일 아침에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오래동안 묵혀 있는 문서를 들여다보고 결재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고종은 오후 3시가 될 때까지 문서 결재를 하였고, 그때 마침 입시한 국왕의 기거와 문안을 살피는 종친들인 승후관(承候官)들이 고종의 집무실로 오자 모두 대궐 밖으로 퇴근하게 하고 고종은 잠자리에 들었다.
정변의 실패, 고대수의 최후
김옥균은 자신의 계책대로 고종이 밤에 잠들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고대수에게 ‘통명전’에 화약을 묻고 대략 밤 9시경에 화약을 터뜨려 통명전을 폭파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고대수는 맡은 바 일을 성공시켰다. 고대수가 창경궁 통명전을 폭발시키자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고종과 왕비는 자다가 일어나 창덕궁 안에 역모를 꾀한 군사들이 들어와 자신들을 시해할 것이라 생각하고 바로 도피하기로 하였다.
창덕궁에서 가장 가까운 별궁(別宮)은 경우궁(景祐宮)과 운현궁(雲峴宮)이 있었다. 경복궁까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빨리 도피하려면 경우궁밖에 없었다. 운현궁은 고종의 아비지 흥선대원군의 집이었기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당시 고종과 흥선군은 매우 불편한 관계였다.
국왕과 왕비의 경우궁 이동 호위에는 고대수도 포함됐다. 고대수는 고종과 왕비를 수행하면서 내심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간의 모멸과 신분적 차별을 혁파하고, 정변 당시 세상에 공개한 개혁안, 강령 14조 중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할 것” 등과 같이 새로운 세상에서 자신이 개혁의 주체로 일할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이 주도한 정변은 3일 만에 끝났다. 정치적 판단이 뛰어난 민왕후가 일본의 개입을 눈치채고 청나라 군사에게 구원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교묘한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게 된 백성들이 일본 공사관을 공격하면서 일본 공사가 도망가고, 김옥균과 박영효 등 정변의 주체들도 모두 도피를 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대수는 대역죄인으로 체포되고 그들은 죽음의 길로 떠나게 되었다. 오늘날 광화문 우체국 자리인 ‘서린옥(瑞潾獄)’에서 광희문 밖 왕십리에 있는 사형장으로 고대수는 끌려갔다. 거대한 몸집의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조선의 백성들은 돌을 던졌다. 그녀는 특히 여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조선의 여인들은 고대수의 혁명을 응원해주지 않고 그녀가 친일파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가혹하게 돌을 던진 것이다.
그녀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너무도 많은 돌덩어리를 맞아 왕십리 청무밭 일대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고대수, 신분의 한계를 극복해서 진짜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고대수,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던져 혁명에 참여한 비극의 여인 고대수!
19세기말 조선의 궁녀 고대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곳곳에 존재한다. 대한민국을 개혁하고, 남녀 차별을 없애고, 권력과 자본으로 뭉쳐진 기득권을 타파하고 진짜 민중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수많은 여인들이 대한민국 곳곳에 존재한다.
비록 고대수의 항거는 실패로 끝났지만 역사는 늘 새롭게 발전한다. 다시 고대수와 같은 혁명의 정신을 가진 여인이 등장하여 실패로 끝난 정변이 아니라 진짜 평등의 세상을 만든 성공한 혁명을 만들어 낼 것이다. 고대수를 추모한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