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흙이 된 두 일본인

[ 황현탁 워킹데이트 ] 한‧일, 긴 안목으로 현안 풀어가는 지혜 필요 

2021-08-07     황현탁 여행작가

친구는 싫으면 절교하고 만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이웃 국가는 그럴 수 없다. 떠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백억 달러의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연간 수백만 명이 왕래하는 국가 사이의 단교는 생각할 수도 없다. 식민지배, 종군위안부, 독도문제 등 한일양국 간에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음에도 서로가 ‘적국 대하듯’하는 오늘을 보면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라는 걱정이 앞선다. 마음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노력을 서로가 해야겠지만, 함께 걸어서는 부지하세월 같아, 같이 달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다.

망우리공원 전경. 사진의 묘지는 아사카와 다쿠미와 관련 없음. (사진=망우리공원 홈페이지)

식민시대 조선 땅에 잠든 두 일본인의 흔적을 둘러보러 망우리 공원을 찾았다. 한때 망우리공동묘지로 불리던 곳이다. 한 사람은 조선반도에 식목일을 제정하고 미루나무와 아카시아나무 식재를 시작하였으며, 총독부 영림창장(산림청장)까지 역임한 사이토 오토사쿠(齊藤音作, 1866~1936)다. 또 한 사람은 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면서 잣나무 종자의 발아촉진 등 산림 녹화에 힘쓰고, 한국의 소반과 도자기에 관한 책(『朝鮮の膳』, 『朝鮮陶磁名考』)을 출판하였을 정도로 한국 민예에 조예가 깊었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이다.

두 사람 모두 망우리 공원의 <주요명사 묘지 현황판>에 새겨지고 위치가 표시되어,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사이토의 묘소는 화장하여 비석 아래 묻는 일본식이어서 봉분은 없고, 비석의 성(姓) 부분과 옆, 뒷면에 총탄(?)을 맞은 것처럼 훼손되어 있다. 뒷면에는 1936년(소화11년)에 작고하였다는 것이 음각되어 있다. 그는 퇴임 후에도 한국에 남아 ‘치산과 녹화’라는 산림경영업무를 ‘업’으로 삼았다. 

아사카와 묘소의 도자기 모양의 묘표는 그의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4~1964)가 한국의 청화백자추초문각호(靑華白磁秋草文角壺, 일본 도쿄 일본 민예관 소장)를 본떠 만든 조각품이며, 묘지명, 상석, 검은 돌 단비 모두 훗날 한국인들이 세운 것이다. 아사카와는 식목일(당시는 4월 3일) 행사준비 중 급성 폐렴으로 순직하여 그의 기일인 매년 4월 2일에는 묘소에서 추모식이 열린다.

아사카와의 저서를 번역한 민속학자 고 심우성(1934~2018)은 ‘옮긴이의 말’에서 “조선총독부가 삼천리금수강산을 본격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한 1910년대, 별나게 한국문화를 사랑한 세 사람이 있었다. 조선의 예술을 미학적으로 접근했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 남산소학교의 교사로서 조선 도자기에 심취하고 만들기도 하였던 아사카와 노리타카, 그리고 그의 동생인 다쿠미이다.”라고 언급하였다. 

야나기는 일제가 광화문을 허물고 경복궁에 조선총독부를 지으려 하자,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있다. 네가 지난날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파묻혀 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으냐?”로 시작되는 광화문철거반대운동에 불을 지핀 장본인이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조선도자연구의 개척자로 전국의 가마터를 발로 뛰어 조사하고 연구하여 ‘조선도자의 귀신’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동생 다쿠미는 산림녹화라는 공직수행과 병행하여, 소반, 식기, 생활용구 등 민예품을 수집하고 기증해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 국립민속박물관의 모태가 되도록 하였다. 아사카와 형제는 야나기와 교류하면서 야나기의 조선미술연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는 아사카와형제현창회가 결성되어 한일양국간의 친선을 도모하고 추모의 의미를 확산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한국말을 하고 한국의 옷을 입고, 오상순, 염상섭, 변영로 등 한국의 예술인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가족은 조선옷을 입혀 입관하였으며, 장례식에서 상여를 메겠다는 이웃이 넘쳐 마을 이장이 골라서 운구토록 하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진정한 한국의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인문탐험가 이동식(언론인, 1953~)은 다쿠미를 추모하면서, “1920년대 이 땅에 와서 살면서 땅과 사람들을 사랑했고, 헐벗은 산야에 심을 나무를 가꾸었고, 미처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 우리들 삶 속에서의 아름다운 감각과 생각과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사랑해서 그것의 값어치를 정리해 드러내 보였다. 이 사람에게 조선은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는, 열등한 인종이 사는 땅이 아니라 친구들이 살아가는 땅이기에, 그들의 삶 자체 하나하나의 값어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사랑하고 키워주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참 인간이었다”고 쓰고 있다.

2021년 아사카와 다쿠미 추모식에서 시인 김미희는 다음과 같은 헌시를 바쳤다.

(...)
 소반을 사랑했고
 도자기에 매료됐으며
 흠뻑 한국미에 젖어
 온몸으로 한국을 사랑한 당신
 (...)
 다쿠미여! 무덤에 핀 꽃 우리에게 주고 편히 잠들라.
 (...)

과거사 문제가 정치, 사법, 군사 및 경제 등에 영향을 미치면서 반일(反日), 혐한(嫌韓) 정서가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확산 되었다. 17세기 말부터 대조선 외교를 담당하였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는 ‘성실한 자세로 믿음을 가지고 교류하자’는 성신교린(誠信交隣)의 외교를 주창하였는데, 일본과 한국 모두 눈앞의 정치‧외교적 유불리를 떠나 장래의 양국관계를 생각하는 긴 안목으로 쌓인 현안들을 풀어나가야 한다. 외교나 나라의 장래를 차분한 이성이 아닌 뜨거운 감성으로 다루어서는 안 되는데 하는 아쉬움이 너무나 크다. 코로나19가 빨리 종식되어, 양국 사이의 여행과 관광이 전처럼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상대를 알고 이해하고 친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기 때문이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