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노회찬·이준석 총선 때 늪에 빠진 이유, 선거제도
유권자 표심 더 살리는 방향 선거제도 개혁은 상식적 선거제도 개혁이야말로 양질의 국회의원 선택하는 길 다당제 기반 유권자, 지지 옮기기 쉽고 감정 소모 줄여 대선주자급 인물 뽑히는 구조 만들고 검증은 제도권서
나는 누차 개혁적 신당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역설해왔다. 그런데 내가 추구하는 선거제도 개혁은 신당과는 연관이 없다. 오히려 현행 선거제도의 유지를 염두하고 내놓은 것이 개혁신당이다. 선거제 개혁이 개혁신당에게 유리하다는 보장도 없다.
첫째, 선거제도가 개혁되면 기성 거대 정당이 분화되거나 현재의 군소정당 입지가 강해져 되레 개혁신당이 움틀 만한 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다.
둘째, 지지율과 의석수 사이의 비례성이 낮고 양당제를 강제하는 현행 선거제도는 기성 거대 정당의 버팀목이었지만, 기성 거대정당이 어느 선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신생 정당이 어느 선을 돌파하는 순간, 정치권에 파괴적 효과가 일어난다. 영국 자유당과 프랑스 공화당·사회당의 몰락이,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앙마르슈(현 르네상스)의 부상이 그 예다. 이는 비례대표 없이 모든 의석을 소선거구에서 선출하는 저비례성 선거제도에서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고비례성 선거제도였다면 영국 자유당과 프랑스 공화당, 사회당은 지지율만큼의 의석은 보장받으면서 급격한 퇴조는 면했을 것이다. 떨어지는 와중에 안전장치를 거는 것처럼 말이다. 20세기 초반 북유럽 국가들의 선거제 개혁은 기성 거대정당들의 결심으로 이뤄졌다.
선거제도 개혁은 초당적이고 보편적이다. 선거제도 개혁을 강조하는 이유는 특정정당의 유불리와 상관이 없다. 정치인은 유불리를 따져 선거제도에 대한 입장을 정하는 법이지만, 현재 정치권의 선거제도 담론만 봐도 ‘당 대 당’보다 ‘당내구도’가 훨씬 두드러진다. 선거제도의 어떤 면모가 특정 정당에게 유리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불리함도 있다. 그 유리함을 다른 정당이 누릴 수도 있으며, (위에서 예시한 예처럼) 국면과 조건에 따라 특정 정당에게 유리(불리)했던 제도가 불리(유리)하게 바뀔 수도 있다.
비례성을 올리는 방향으로 선거제도를 개혁한다는 것은 ’지지율만큼 의석수를 보장’하는 것이다. 상식적 수준일 뿐이다. ‘더 많이 득표하는 쪽이 더 많이 가져간다‘는 선거의 절대 법칙은 더 철저히 구현된다. 저비례성 선거제에선 지지율 2위이하 정당이 제1당이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고비례성 선거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지율 10%인 정당이 20% 의석을 가져갈 수 있는 제도는 고비례성 선거제가 아니라 저비례성 선거제다.
다시 말하면 ‘비례대표제’는 ‘정당만 찍고 인물은 고를 수 없는 제도’가 아니다. 한 지역구에서 여러 명을 선출하면서, 유권자가 지지하는 정당과 인물에 동시에 투표함으로써, 정당 의석은 정당 지지율로, 당내 당선자/낙선자는 후보별 득표율로 결정하는 ’개방형 비례제‘가 선진국 대다수가 채택한 제도다.
저비례성 선거제도 하에서도 다당제를 포기하지 않은 한국 유권자가 많으므로, 한국에서 선거제도가 개혁되면 다당제로 이행할 공산이 크다.
다당제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선거제도 개혁은 무엇을 위함일까. 유권자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다. 한쪽에 정권을 쥐어줬다가 기대와 다른 결과에 실망해 반대쪽을 미는 유권자들은 늘어왔다. 그 결과가 2022년의 ‘비호감 대선’이다. 정권교체가 쉽지 않은 체제에서는 양당제가 합리화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네 차례나 경험했다. 이 당 저 당으로 지지를 옮겨본 유권자들은 두들겨 맞는 '셔틀콕 신세'였다.
반면 다당제에서의 유권자는 자신이 지지하던 정당에게 배신당할 경우 그 나머지 정당들 중 가장 가까운 정당을 선택하면 된다. 지지를 옮기기 쉬운 동시에, 지지 정당 변동이 과격하지 않기에 감정 소모가 줄어든다. 선거에 임하는 마음가짐부터 편해진다. 2017년 대선에서는 TV토론 고정 출연 후보가 5명이었고, 3위 이하 후보들의 득표율 총합이 1987년 대선과 비슷한 역대 최대급이었다. 이 대선은 역대 다른 대선에 비해 “찍고 싶은 후보가 없어서 고민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에 2명을 놓고 고민했다”는 유권자들이 많았다.
정치인의 고통을 보면 유권자의 고통도 보인다. 선거제도 개혁은 다수 유권자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 정치의 축이 된 정치인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 예는 좌우로 폭 넓게 펼쳐져 있다. 고 노무현(리버럴), 고 노회찬(진보), 이준석(보수)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들 각각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이들은 낙선할 때에도 '한국 정치인 300명'에 너끈히 들고도 남는 정치인들이었다. 그러나 소선거구제에서 여러 번 패배하며 국회의원 300명 안에 들지 못했다. 한 선거구에서 여럿을 뽑고 정당이 지지율만큼 의석수를 갖도록 했다면, 이들이 낙선으로 후달릴 일은 없었다.
연이은 낙선으로 고생시켜서 대통령감을 만들겠다고? 그것은 노무현으로 끝이어야 한다. 낙선한 정치인은 감정적·재정적으로 멍 들고 시간적·공간적으로 곤경을 겪는다. 이왕 정치인을 고생시키겠다면 제도권에서 고생시켜야 한다. 노무현의 5공청문회, 노회찬의 삼성X파일 폭로 같은 사건을 지켜보며 검증했던 것처럼 말이다. 선거제도 개혁은 국회의원의 질을 올리고 국회에 대한 국민의 인정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김수민은 풀뿌리운동과 정당활동을 하다 현재는 지상파와 종편, 언론사 유튜브 방송 등에서 정치평론가로 활약 중이다. 팟캐스트 <김수민의 뉴스밑장> 진행도 맡고 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경북 구미시의회 시의원을 지냈다. 시의원 시절엔 친박 세력과 싸웠고, 조국 사태 국면에서는 문재인 정권 핵심 지지층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다당제와 선거제도>(eBook)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