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 허위와 위선의 시대에 저항하다!

2023-01-19     김준혁 한신대 교수

서학도 포용하는 저항의 사대부

 “새로운 지식은 이서(異書)에서 얻는다”

 주자(朱子)의 학문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죽음에까지 이르는 시대가 바로 18세기 조선이었다. 이 시대에 감히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 절대 읽어서는 안된다는 서학(西學)의 서적인 ‘이서(異書)’를 읽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 말을 한 사람은 목숨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인 모양이다. 이 엄청난 말을 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바로 조선후기 실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성호(星湖) 이익(李瀷)이다. 

성호 이익 초상화.

우리는 흔히 성호 이익이 반계 유형원의 뒤를 이어 실학을 연구한 학자이니 서학에 대하여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학통을 보면 이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잇는 남인(南人) 학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남인이 조선후기 개혁군주 정조의 우군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인을 개방적으로 보는 이들이 많은데, 경기 지역의 남인은 개방적인 측면이 있지만, 영남지역 남인들은 매우 보수적이었다. 영남 지역 남인들은 천주교에 대하여 노론 학자들만큼 단호하게 배척하였다. 그러니 영남 남인이든, 기호남인이든 모든 남인의 학문적 종장(宗匠)인 성호 이익이 서학을 포용하고, 이러한 서적에서 국가를 발전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더 낫게 할 수 있는 지식과 실용적 기술을 얻고자 한 것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이 파격의 주인공은 삶을 살아갈수록 더욱더 시대의 이념과 관습에 항거하는 사상과 행동으로 나아갔다.

기득권에 대한 저항으로 멸문 당한 집안 출신

그렇다면 성호 이익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파격적인 사고를 지니게 되었을까? 아마도 성호가 기존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는 고루한 생각을 깬 것은 집안의 비극 때문일 것이다. 기득권에 저항하다가 멸문지화를 입어 평생 초야에 은거할 수 밖에 없던 가문의 불행이 그를 은미(隱微)한 혁명가로 만들었을 것이다.

성호의 아버지 이하진(李夏鎭)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다. 남인을 이끌어가는 정치가였던 이하진은 숙종의 권력 장악을 위한 변심으로, 요즘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했던 신분에서 평안도 운산(雲山)으로 유배를 갔다. 일명 ‘경신환국(庚申換局)’이라 불리는 정치적 파동에 의해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을 할 때, 서인의 우두머리 김석주가 이하진을 가장 험한 유배지로 보낸 것이다. 이하진은 이곳에서 분노의 치를 떨다가 2년 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성호 이익이 태어난 지 겨우 8개월 되었을 때였다.

남편을 잃은 이익의 어머니는 경기도 안산의 첨성리로 이사를 가서 삯바느질을 하면서 막내 아들을 키웠다. 어린 이익은 둘째 형 이잠에게서 공부를 배우며 성장하였다. 이잠은 남인의 학통, 즉 퇴계 이황의 학통을 잇는 수재라는 평가를 들었던 인물이다. 학문만 출중한 것이 아니라 강직하고 리더로서의 역량이 커 장차 남인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는 16세가 되던 1675년(숙종 1) 을묘사마시(乙卯司馬試)에 진사로 합격하지만 아버지 이하진의 경계에 따라 대과 응시를 미뤘다. 아버지 이하진은 그가 재주만 뛰어나고 덕(德)이 부족할까 염려하여 “큰 그릇은 일찍 이루어지는 것을 꺼린다(大器忌早成)”고 경계하였다. 

하지만 이로부터 7년 뒤에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자 이잠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과거를 완전히 포기하였다. 그리고 첨성리로 와서 아버지의 후처인 성호의 어머니 안동 권씨를 모시고 살면서 동생인 성호의 스승으로서 학문을 지도하였다. 하지만 늘 비분강개해 있던 그는 노론의 책사인 김춘택이 숙종의 원자인 경종(景宗)의 세자 책봉을 방해한다고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오히려 장살(杖殺) 당하여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유배지에서 죽고, 자신의 스승격이나 마찬가지였던 형은 권력을 장악한 노론(老論)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맞아 죽었으니, 성호의 집안은 대역죄(大逆罪) 집안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표현대로 ‘폐족(廢族)’이 된 것이다. 그러니 성호는 노론이 판치는 조선 사회의 기득권에 대하여 좋은 생각을 갖고 있을리 만무했다. 또한 ‘주자절대주의(朱子絶對主義)’를 인정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집안의 역사와 시대에 대한 거부가 그를 공자와 주자만을 존숭하는 사대부가 아닌 이를 뛰어넘는 특별한 항거의 학자로 만들었다.

성호선생 문집.

"나는 한 마리의 좀벌레다"

성호는 한평생을 ‘처사(處士)’로 살았다. ‘처사’란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던 선비를 일컫는다. 그보다 앞서 처사로 불렸던 이들이 있다. 좌우 허리에 칼을 차고 방울을 달아 자신을 단속했던 남명 조식, 황진이가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꼽았다는 화담 서경덕 같은 분들이다.

성호는 “나는 한 마리의 좀벌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책하며 실용의 학문과 삶에 힘을 쏟았다. 그는 직접 논에 들어가 모내기를 하고, 여름에 피를 뽑고 김매기를 하고, 가을에 낫을 들고 벼베기를 했다. 목구멍에 거미줄이 쳐도 절대 일하지 않고 그저 책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조선의 사대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성호 이익도 처음부터 직접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 역시 책을 좋아하는 공부벌레였다. 

“나는 천성이 책을 좋아해 날마다 끙끙대며 읽느라고 베 한 올, 쌀 한 톨 내 힘으로 장만하지 않는다. 천지간에의 좀벌레 한 마리란 말이 어찌 나 같은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랴?” 

스스로가 이렇게 이야기했듯,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사대부들처럼 농사지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둘째 형인 이잠이 죽고 나서부터 인생관이 바뀌어 직접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집안의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본인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고, 더불어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직접 농사를 짓는 실용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호가 살던 시대는 두 번의 전쟁으로 농토는 크게 줄어들었고, 날씨조차 좋지 않았다. 특히 1670~1671년에 일어난 대기근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재해였다.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보릿고개’를 풀뿌리와 나무 껍질로 연명하며 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부유하거나 귀한 집’인 양반 사대부들은 자기 과시를 위해 하루에 일곱 끼를 먹었다. 성호 이익은 이들이 먹는 하루의 일곱끼 식사면 백명도 먹일 수 있다고 개탄을 했다. 그래서 그는 사대부로서의 품격을 망각한 이들을 조롱하듯 밥을 적게 먹겠다고 선언했다. 밥을 적게 먹겠다고 선언한 것은 어쩌면 시대에 대한 작은 저항일 수 있다.

"여섯 가지 좀벌레가 나라를 병들게 한다"

이 작은 저항을 넘어 거대한 저항으로 나가기 위해 성호는 조선 사회를 진단했다. 성호는 조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좀벌레 여섯 가지를 지적했다. “노비제도, 과거제도, 벌열(閥閱)제도, 기교(技巧), 승려, 게으름뱅이”다.

그는 좀벌레를 없애는 대안까지 제시했다. 첫째, 노비의 세습과 매매를 금지하여 점차 노비제도를 없애야 한다. 둘째, 젊은이들이 농사일은 하지 않고 과거에만 매달리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농사를 짓는 사람 중 추천을 통해 인재를 뽑아야 한다. 셋째, 모든 양반들이 스스로 벌열이라 하면서 농사를 짓지 않고 도리어 농업을 천시하니 벌열을 타파하고 모든 선비들도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사농합일(士農合一)을 이루어야 한다. 넷째, 광대와 무당들은 백성들을 현혹시켜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으니 법으로써 교화시켜 백성들이 농사에 힘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많은 사람들이 세금과 역을 피해 승려가 되려고 하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사찰과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법을 강화해야 한다. 여섯째, 어려서부터 게으름이 몸에 배어 어른이 되어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모자라 도둑질까지 하고 있으니, 이를 막기 위해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부지런함을 보여 백성들이 따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기 안산시 일동에 위치한 성호 이익의 묘소와 묘비.

사농합일(士農合一), 사대부가 곧 농부다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은 백성의 생명이 매여 있는 것이다.”

성호 이익이 농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성호는 곡식은 백성의 생명을 이어주고 지탱하는 것이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고, 농사란 그 어떤 일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다. 농사가 잘되면 백성들이 부유해지고, 백성들이 부유해지면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성호는 믿었다.

성호는 인간은 타고나면서부터 관작이나 부귀를 몸에 지니고 나오는 것이 아니며, 천자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애초에 빈천(貧賤)하기는 매양 일반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양반들도 무위도식하지 말고 농토로 돌아가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을 주장하였다. 사대부가 곧 농부인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호는 과거 백성들을 위한 이상 사회가 만들어졌던 시대의 특징이 바로 농사짓는 들에서 인재를 선발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농사를 지었던 이들이기에 백성들의 실제 삶을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또한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귀중한 곡식의 생산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연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시대가 후세에 이르러 망가지게 된 것은 바로 학문만을 중요시해 선비가 호미로 밭을 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풍속이 날로 퇴폐해지고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진 것이라 하였다.

성호에게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토가 있었다. 그는 직접 농사를 짓는 것과 함께 일 잘하고 성실한 노복에게 핵심 농사일을 모두 위임했다. 요즘 말로 전문경영인을 두었던 셈이다. 주인이 신뢰하고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까닭에 노복 또한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여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에 힘입어 만년의 살림살이가 다소 넉넉해질 수 있었다. 성호는 아랫 사람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려 하였다. 성호는 종들을 양반들과 큰 차별을 하지 않고 어루만지고 보살펴 주었다. 농사를 맡았던 종이 죽었을 때는 그는 친히 종의 집에 찾아가서 곡을 하였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한 ‘사노합일(士奴合一)’을 성호가 한 것이다.

성호는 직접 닭을 키웠는데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할계전(瞎鷄傳)’과 ‘우계전(友鷄傳)’이라는 글이다. ‘할계전’은 한쪽 눈이 먼 어미 닭이 병아리를 거두어 잘 기르는 것을 칭송한 것이며, ‘우계전’은 들짐승에게 어미 닭을 잃은 어린 병아리를 돌보는 먼저 태어난 암탉의 우애를 칭송하는 글이다. 

암탉은 결국 들짐승에게 잡아 먹혔는데 성호는 남은 깃털을 수습하여 관을 만들어 산에 장사를 지내고, 그 무덤을 ‘우계총(友鷄塚)’이라 이름까지 붙였다. 그뿐만 아니라 집에 기르는 개가 죽자 묻어 주도록 했을 정도였다. 요즘의 반려동물 애호가 이상이다.

그는 스스로 농사짓는 자신을 향해 작은 시를 한 편 썼다. “밝은 세상 낮은 식솔들과 섞여 사니, 늙은 농부라 불러도 그 또한 즐겁다네. 뜰의 잡초 뽑으니 오늘도 피로하지만, 잘 뵈는 곳에 옮긴 꽃 언제나 피려나. 손으로 키우자니 힘들여야 마땅하고, 마음으로 보살피자니 머리 써야 마땅하네. 농사란 오래 지어야 참으로 평생 사업, 한 곳에 매인 생애 누가 싫어하겠는가!”

경기 안산시 이동에 있는 성호박물관.

양반들의 토지를 정확히 파악하라!

성호는 국가와 사회가 조화롭게 유지되기 위한 핵심으로 경제가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익을 얻고 그 이익 속에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익 추구를 중시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일반 성리학자와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군자는 이익(利)을 바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단, 의(義)를 뒤로하고 이익을 우선하면 욕망의 충족으로 흐르게 되고, 다시 ‘의로움의 조화(義之和)로 나갈 수 없다. 따라서 공자가 이익을 드물게 말하였지만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성호는 재물이 없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다는 현실과 재물에만 힘쓰는 것은 더욱 안된다는 유학의 가르침을 조화롭게 추구하고자 하였다. 성호는 사람은 저마다 지혜와 역량이 있으므로 토지를 경작하여 먹고 마시어 스스로 삶을 꾀하기에 충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군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에도 그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하게 되도록 인도하지만, 사실상 그리 크게 할 일은 없다고 보았다. 원론적으로 국가는 백성들을 해치거나 겁탈하지 않고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게 하는 정도로 보았던 것이다. 

실제 백성들이 부유해지는 것은 바로 백성들 자신이 좋은 생각과 노력을 통하여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을 이용하여 스스로 경제적 안정을 얻는 것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백성들의 노력을 기득권층이 막기 때문에 국가가 이들 기득권층들의 잘못된 행위를 막아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우리 사회야말로 기득권이 너무도 많은 것을 장악하고, 저소득층과 중산층이 더 나은 세계로 나갈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성호는 백성을 구휼한다는 명목으로 토지세를 줄여주는 것은 올바른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근시안적 처사라고 비판하였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 토지세를 줄여주면 그것이 농민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호는 토지세 경감이 결코 일반 백성들과 가난한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당시 토지가 일반 백성들보다 양반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향촌사회에서 양반들의 토지 소유가 절대적이었고, 이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지방 관아에서 정리한 토지 장부에 그들의 농토는 빠지게 하였다. 그러니 애초부터 국가에 토지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성호는 ‘양전(量田)사업’을 강하게 주장했었다. ‘양전사업’이란 오늘날 토지측량사업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전사업’을 통해 토지를 정확히 측량해서 관아의 토지 장부에 기입하고, 이를 통해 세금을 부과하여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자는 것이다. 국가 재정이 안정되지 않으면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구조화되어 절대 백성들이 부유해질 수 없다는 게 성호의 철저한 경제관이었다. 오늘날 재산을 숨기고 세금을 내지 않는 이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돈과 권력으로 검찰과 국세청 등 권력기관과 내통하여 세금을 내지않고 재산을 불리는 행태를 바로잡는게 경제민주화로 가는 길이다. 

경기 안산시 일동에 위치한 이익 선생의 사당(오른쪽).

"제사는 지극히 간소하게 마음으로 지내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장례(葬禮)와 그 이후에 지내는 제사(祭祀)다. 가족들의 죽음과 사회적 인물들의 죽음을 맞이하고 해결하는 장례 절차는 너무나도 많은 단계와 절차가 있었다. 조선 사회에서 효의 가치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는 그 무엇보다도 허위와 가식의 모양새를 띠었다.

상례와 장례를 소홀히 하는 사람들은 조선 사회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없었고 패륜이라는 이름으로 냉혹한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상례와 장례의 절차를 잘 받드는 사람들은 당대 사회에서 어진 이와 효자로 인정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례와 장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자신이 진심으로 효행을 하고 싶은 의지가 있기도 했지만 보여주기 위한 행동도 그에 못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많은 비용과 시간을 할애하여 상례와 장례를 치루었다.

이것이야 말로 조선사회를 망치는 근원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성호는 상례와 장례 그리고 제사의 개혁이 조선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행동과 절차는 중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상례와 장례를 지극히 간단하게 치르자고 주장했다. 자신이 몸소 실천하고 그의 제자들에게 반드시 실천하라고 지시하였다. 

장례의 그 무수한 의례도 문제이고, 그 뒤에 제사와 명절의 차례도 엄청난 음식을 차리는 것도 문제였다. 돈은 없는데, 제사 음식을 장만하느라 집안이 거덜날 지경이 되기도 한다. 며칠 뒤면 ‘계묘년(癸卯年)’ 설 명절인데, 이때 지내는 차례 음식 장만도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보다 조선후기 사회는 더욱 심했다. 성호는 차례 음식을 본인들의 경제 형편에 맞게 준비하고, 마음을 더 담아 치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정 맞는 일이다. 그래서 성호 이익도 차례를 지낼 때 음식 가짓수가 많지 않았다. 

상례와 장례에 들어가는 경제적 비용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하자는 게 성호의 생각이었다. 허례와 허위를 깨는 것이 성호의 생각이었고, 시대에 대한 항거였다.

오늘 우리는 성호 이익의 실학(實學)을 계승하여야 한다. 남북은 분단되고 경제적 양극화는 심화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패륜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가 왔다. 참으로 슬픈 시대에 우리는 살고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대 정신을 갖고 살아간 역사의 은사를 존숭하고 따라 배울 필요가 있다. 그 역사 인물이 바로 성호 이익 선생이다. 시대에 대한 저항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이익 선생의 실학 정신과, 폐습을 극복하고자 하는 저항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다시 정의로운 사회로, 누구나 경제적으로 행복한 시대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