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 호기심 부르고, 중장년 추억 소환하는 서울풍물시장
[ 황현탁의 워킹데이트 ]
신설동에는 ‘서울풍물시장’이 있다. 그런데 나발, 태평소, 꽹과리, 북, 장구, 징 따위를 불거나 치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때로는 곡예를 곁들이는 ‘풍물놀이’는 없다. 또 엿장수 가위 소리, 뻥튀기 소리, 동동크림 아저씨가 발목에 걸린 줄을 당겨 두드리는 북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팔고 있는 물건들은 신발, 의류, 공구, 장식품 등 다양하며, 말만 잘하면 값을 깎아주기도 한다. 거리에는 테니스공으로 재주를 부리는 아저씨도 있고, 멸치와 마늘쫑 안주를 곁들여 막걸리 한잔에 1000원 하는 ‘선(立) 술집’도 있다. 옛날 면소재지 5일장 시장판을 보는 것 같다.
인근 황학동의 만물시장, 벼룩시장이 풍물시장의 원조였는데, 세월 따라 청계천, 동대문을 전전했다. 그때는 불법인 ‘난전(亂廛)’이었으나 2008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여 ‘합법적’으로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주말에는 건물주변 골목에 상인들이 ‘노점’을 차리기도 하여 떠들썩하며, 먹거리나 마실 거리 텐트도 운영된다. 화요일은 장이 서지 않는다. 나다니는 사람들의 연령대를 보니 내 나이 또래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 찾는 사람들 같았다.
골동품 파는 구역으로 들어가 통로를 따라 죽 살폈더니 불상과, 금도금에 색 구슬을 박은 인도풍의 장식품이 눈에 많이 띄었다. 켜켜이 쌓인 물품들을 일일이 들춰보진 않았지만, 예스럽거나 고상한 물품보다는 촌스럽거나(?) 이국적인 물품들이 많았다. 한옥, 아파트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관심을 둔 것은 고서화였는데, 한지로 된 고서를 쌓아둔 곳에는 좀이 쏠린 두루마리형태의 서화, 천이 바랜 병풍도 있었다. 살 것도 아니어서 펴 보여 달란 부탁은 할 수 없었다. 여러 가게에서 본 그림의 대부분은 잉어나 산수를 그린 ‘이발소’그림이었다. 어느 가게에는 ‘남농’(허건)작이란 대나무그림, 걸레스님 중광의 도인그림도 보였다.
이조백자나 고려청자 가게에는 ‘진품이 아니면 끝까지 책임진다.’는 문구를 붙여 놓았는데, 지나면서 들으니 1억 원짜리도 있단다. 서양의 유명한 도자회사들의 전시용 접시나 인형도 가끔 보였고, 장식장이나 고가구를 파는 곳도 있었다. 또 정원용으로 제작한 악기를 타는 조각상이나 인물상도 보였으며, 수석이나 광물 샘플을 파는 곳도 있었다. 인두, 다리미, 목수의 먹줄용구, 화로, 향로 등도 판매되고 있다. 무엇에 쓰는 용구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층으로 오르는 통로에는 쟁기, 탈곡기, 써레, 됫박, 풍로 등 농가에서 쓰던 용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의 청춘1번가에는 교복을 입어보는 곳, 진짜 머리를 잘라주는 미용실, 음료수를 사 마실 수 있는 다방도 있고, 극장, 식당, 교실, 레코드가게, 만화방 등 옛 추억을 소환할 수 있도록 모양을 갖추어 놓았다. 물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신품이지만 싸구려 티가 나는 의류나 잡화 파는 구역과 식당가는 패스했다. 건물을 나와 거리의 ‘잔술’파는 선술집 앞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막걸리 한 잔을 받아, 테이블에 놓아둔 멸치 두 마리 마늘쫑 한마디를 고추장에 찍어 안주해 목을 축였다. 혼자서 마셔 그 옛날 친구들과 함께 즐겼던 막걸리 맛은 나지 않았다. 독에 술이 떨어질 때쯤 말술을 들이 붙는다. 쿨룩쿨룩 소리를 내며 독이 차는 모습은 옛날 그대로다.
기껏 50여년이 지났음에도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많은 물품들을 보니 시대의 변화를 절감한다. 농기구를 보니 여름철 보리타작하면서 셔츠 안으로 들어간 가시랭이(까끄레기) 때문에 등물을 하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도자기 인형이나 접시 등 수입 장식품을 보니, 어느 장관 후보자 부인이 남편 해외근무 중 사 들여와 판매한 일로 ‘판서벼슬’을 날려버린 생각도 떠오른다.
나는 가난한 농촌 출신이어서 도회 젊은이가 경험했을 영화관람, 다방출입 같은 일탈의 기억은 없어 청춘일번가의 스토리는 남의 얘기였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운 중장년이라면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을 찾아가 보라. 몇 가지 추억은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