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언 불가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가– 임선이

2022-08-28     심정택

지난 18일, 충남 천안 고속터미널에 내려 백화점 앞에서 탄 600번 버스는 구도심과 시 외곽 가로변 물류 창고 등을 지나 가로수가 우거진 녹음 속을 달린 뒤 광덕면 창작촌 앞에 섰다. 44개의 정거장을 지났다. 창작촌 내 미술관 터 정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필자는 작가 및 작품을 평가할 때 정체성, 조형미, 메시지를 본다. 정체성은 작가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 지를 알고 있느냐이다. 

Trifocal sight3 라이트젯 c프린트 220×176 2008 cm/사진제공 = 임선이 작가    

조형 능력은 모든 작가의 기본 조건이다. 비구상 작가라고 구상 능력이 없어서는 안되고 조각가도 드로잉 실력은 갖추어야 한다.

현대 미술이 난해하지만 최소한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관객은 알 수 있어야 한다. 이미지는 언어보다 쉬워야 한다. 평론이라는 명분으로 온갖 미사여구가 앞서는 작품은 미술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고 본다.

설치 작가는, 작품의 스케일과 난해성으로 인해 의사 소통이 더욱 중요하다. 몇 편의 작품, 자료 중심의 포트폴리오, 한 두 시간 대화로 작품 세계를 전부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동시대 미술에서 설치를 장르적인 카테고리에 가둬둘 일도 아니다.

임선이 작가의 출발은 조각이다. 20대 중반을 넘어서 중앙대 예술대 조소과에 입학, 절치부심하며 공부했다. 돌아보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예술가의 삶이 있다. 학교가 있는 경기도 안성에 삶의 터를 잡았지만 서울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부터는 전국의 창작스튜디오를 옮겨 다니며 작업을 한다.

바람의 무게- 여행자의 시간 전시전경 2021/ 사진제공 = 임선이 작가

"2021년 11월 <바람의 무게 -  #여행자의 시간> 전시 제목은 시나리오에서 
표기되는 scene(장면)과 같이 실제 사건을 하나의 scene으로 의미하여 지어졌다. 전시는 어느 날 섬광처럼 찾아온 가족(어머니)의 죽음과 이를 맞이하는 과정의 시간을 담아 4개의 방으로 나누어 제작되었다. (…) 그녀가 남기고 간 유품을 통해 
살아왔던 삶의 모습과 시공간에 대한 특정한 기억을 작품으로 풀어내고 있다."<작가노트>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생명의 뿌리이다. 그 뿌리가 꺾이었으니 뿌리에서 나온 생명 또한 유한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물성이 없는 대상, ‘없음’ 혹은 ‘부재(不在)’는 시각적 표현의 난제이다.

산수 연작을 끝내고 2019년 <양자의 느린 시간> 전시부터는 작가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이야기, 다른 이들이 간과하는 일상을 들여다 보고자 하는 일련의 흐름으로 방향을 잡았으나 어머니의 죽음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30대로 접어들기 직전의 첫 개인전의 전시 타이틀이 <Shelter. 2003년>이다. 작가는 쉘터(shelter)를 거주지가 아니라 ‘은신처’로 이해한다. 은신처는 미셸 푸코가 말한 비일상(非日常)·한시적 유토피아인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s)로 이해된다. 거주지가 갖는 장식, 정보, 상징적 측면인 사인(signage·기호)이 배제되어 있다.

Shelter- landscape 시멘트, 석고 가변설치 2003 / 사진제공 =임선이 작가

작가는 한 자리에 머물며 사는 식물, 실제 살아있는 선인장을 석고 틀로 떠낸 창백하고 딱딱한 수백 개의 시멘트 선인장을 바닥에 늘어놓았다.

2005년 두 번째 전시 <갇힌-섬>는 섬이 가지는 지형적 조건, 고립이 현대를 사는 도시인들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다 가운데 존재하는 섬이 도시 한가운데로 들어온다면 어떨까를 상상해 보았다. 작가는 새벽녘 TV의 첫 울림인 4절까지 계속되는 <애국가> 방송에서는 동해의 독도가 선명하였다. 

2007년 <부조리한 여행> 전시부터2015년 <걸어가는 도시-흔들리는 풍경> >에 이르는 동안 작가는 본격적으로 산수(山水) 연작에 천착했다. 

Trifocal sight3 라이트젯c프린트 154×220 cm 2008/사진제공=임선이 작가

작업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선택한 지명의 실측 지도를 일정한 비율로 축적해서 한 장씩 인쇄를 한다. 2. 인쇄한 종이를 지형도의 등고선을 따라 칼로 하나씩 오려낸 종이를 한 장 한 장씩 쌓아 올린다. 3. 쌓아 올린 수 천 장의 종이들은 단층과 결을 이루며 입체를 이루고, 그 형태는 음각(협곡)과 양각(산)의 형태로 표현된다. 작가가 원하는 높이만큼 쌓아 올리려면 2~3개월까지도 걸린다.

작업 과정 중에 단층 자체에 형태가 드러나는데, 이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형태도 보여진다. 형성된 모형은 사진 작업으로 변환시킨다. 집약된 기계적인 반복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작품 속 작가 자신일 수도 있는 도시인이 여행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2006년~2007년 서울의 창동 창작 스튜디오 입주 시기, 자주 접한 서울의 인왕산을 대상으로 지형도 작업을 하였다. 도시 공간 안에 들어온 ‘인왕산’ 이라는 자연을 바라보는 도시인의 이미 각인되어 있는 관점, 새롭게 관찰을 하면서 발견한 요소 등이 작업에 더해졌다. 

서울의 산은 근현대 이전 시대의 서사와 서정의 주인공으로도 등장한다. 조선시대 단종과 함께 희생된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1418~1453)은 인왕산 수성동 계곡 위쪽에 비해당(匪懈堂)을 짓고 살았다. 1751년에  겸재 정선( 1676~1759)은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남겼다.

〈붉은 눈으로 바라본 산수〉는 ‘인왕산’ 지형도 데이터를 캐드 파일로 붉은 색으로 수천 장 인쇄하여 한 장 한 장 적재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변환되는 게 있다. 작품은 집적된 등고선 음영을 비추는 조명과 보이는 시점에 따라 극대화된다. 시리즈 중, 특정부분을 클로즈업한 람다 프린트 사진 작업은 마치 깊은 협곡 어딘가를 여행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서울의 또 다른 산인 남산은 파란 색으로 인쇄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적재하였다. 장충단과 용산에 걸친 남산의 물리적 구조물들과 지도 등고선의 레이어가 결합된 형태를 띤다.

‘인왕산’은 조각적 지형도의 형태로 드러난다. 사진은 설치 작업의 파생 작품인 반면 ‘남산’은 조각적 작업 이전에 사진 작업을 선행했다.

사진 작업을 위해 안개를 피워 올리는 연출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치 남미의 얼굴인 고대 문명을 간직한 공중도시 마추픽추 같기도 하고, SF 영화의 빙하기의 풍경 같기도 하다.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가 말한 ‘형언불가의 공간’(L'Espace indicible) 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극점 3 라이트젯 c 프린트 150×1112 cm 2014 / 사진제공 = 임선이 작가

입체가 아닌 자연물 문양의 벽지를 재현한 『From island to island』(2005), 횡으로 삼분 구도로 프레임된 유리 에칭 화폭에 산의 능선과도 같은 기울기를 가진 꽃무늬 이불 천 위에 나비를 형상화한 이미지의 『머물다』(2008)는 조명이 떨어지면 그림자를 드리웠다. 

머물다 각 90×90 cm 디지털 프린트 유리에 에칭 2008 / 사진 제공 = 임선이 작가

2009년 전시, '기술하는 풍경' '어려운 눈들·Difficult Eyes'과 '흔들리는 눈들·Trembling Eyes' 연작에서 작가는 모호한 기대와 혼란, 어지러운 시행착오가 반복되는 일상의 불투명함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

'어려운 눈들·Difficult Eyes'은 360도에서 본 대상의 이미지를 10도씩 돌려서 찍어낸 입체적 시선이다. 여러 방향의 이미지를 하나의 평면에 '상'들로 가둠으로써, 보여지는 형상의 윤곽은 없어지고 이미지만 남긴다.

'흔들리는 눈들·Trembling eyes'(2010)나 '회향'(2013) 연작에서는 여러 개의 시점을 동시에 개입시켜 정물을 촬영함으로써 시간의 흐름 속에서 축적된 상을 재현하였다. 레이어를 투명하게 겹쳐 올려 '스스로의 시선에 회의를 품는다'는 내면을 드러내었다.

2015년 <걸어가는 도시-흔들리는 풍경> 전시에서는, 남산 상공에서 촬영한 항공지도를 각 변 1m, 80cm 크기 두께 3mm 정도의 종이를 수천 장 프린트한 뒤 등고선을 상상해 일일이 칼로 도려냈다. 풀이 마르면서 의도한 형태를 변형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접착제를 쓰지 않고 하나하나 그냥 쌓았다. 작가는 건물들의 콧대를 낮춰 끌어내리고 능선은 날카롭게, 산세는 가파르게 세워 올렸다.

작가는 사진은 설치 작업을 위한 매체로서만 사용되었다고 하나 사진 작품은 그 자체로 원본가치를 갖는다.

관념산수 

실제의 지리정보를 반영한 지형도처럼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임선이의 산수가 마치 동양화의 관념산수처럼 보인다.

일본 교토 료안지(龍安寺)의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은 젠(zen) 스타일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바람과 물이 없다. 그 모래와 돌 위에는 정원을 가다듬을 때 지나갔던 써레질 자국이 료안지의 마른 정원을 선적(禪的)으로 만든다.

일본 책 〈사쿠테이키(作庭記)〉는 정원 문화 관련 고서(古書)이다. 정원 만들기 매뉴얼이다. 국내에서는 2012년 <사쿠테이키 작정기-일본 정원의 미학>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일찍이 어떤 사람은 사람이 만든 정원은 결코 자연풍경을 넘어설 수 없다고 말했다. 국토를 두루 여행하면 반드시 특별히 아름다운 장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근처에는 흥미 없는 장소들도 많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정원을 만들 때는 최고의 경관만 연구하고 관계없는 것들은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 (82쪽)

료안지의 석정(石庭)은 장방형으로 동서 25m, 남북 10m의 넓이로 1500년경 선승들이 조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모래 위에 풀 한 포기 없이 흰 자갈, 이끼, 돌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했다.

편평한 나뉨 인쇄된지형도, 목재 70×202×181 cm 2014/사진제공=임선이 작가 

중국 산수화는 관념주의이고 한국은 실경주의이다.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는 한 폭에 회오리 치는 소용돌이 자연 현상처럼 이미지들을 집어넣을 수 있었던건 매의 눈과 같은 시점이 있어 가능했다.

조선시대 정선에 비견되는 중국의 근대 작가 리커란(李可染·Li Keran·1907~1989)은 중국화의 구도와 구성의 특징을 '이대관소(以大觀小)',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보고, 작은 것 가운데 큰 것을 본다"로 여겼다. 화가가 자신을 거인으로 가정하고 마음의 눈으로 대자연의 전경, 위아래 사방을 살펴 한 폭의 그림으로 만들어내었다.

미국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 필립 존슨(Philip Johnson•1906~2005)이 코네티컷주의 뉴케이넌에 지은 글라스하우스(Glass House)는 당대 건축가, 예술가 등이 모인 사교장으로 사용됐다. 글라스하우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연못 파빌리온(Pond Pavilion)'은 관상용으로 만들어 이 ‘이대관소’를 실천하였다.

뒷면까지도 보려는 피카소의 큐비즘 또한 그 맥락은 같다. 임선이의 산수 연작은 료안지(龍安寺)의 석정(石庭), 정선의 금강전도, 중국화의 ‘이대관소’의 관점을 모두 모은 역작이다.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가진 삶의 궤적, 가라앉은 없어지지 않는 축적된 시간이 있다. 2019년 전시 <양자의 느린 시간>에서 완연한 노년인 아버지의 삶을 반추한 ‘유토피아’ 연작은 80대의 영관 장교 출신인 아버지와 또래의 이발사를 모델로 하였다. 

낡은 철제 통에 들어있는 퇴색한 아버지의 계급장이나 이발소 기구에 새겨진 '유토피아'라는 상표가 안겨주는 괴리감을 통해 한때 찬란했으나 이제는 흐릿해진 그들의 이상을 주지시킨다.

재개발 지역의 낡은 이발소 공간, 주름졌지만 이발사의 손은 마치 날아다니듯 했다. 골프나 격투기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며 TV 리모콘을 돌리는 아버지의 손이 대비되었다. 그들은 각자의 유토피아에 머물러 있었다.

신체에 나타난 삶의 흔적과 몸의 무의식적 행위에서 드러나는 함축된 층위를 찾아내었다. 노화된 눈과 손, 말의 파동, 느린 기억의 회로 등 몸에 나타난 기억들을 유기적으로 카테고리화했다.

임선이의 작품들은 설치와 영상, 오브제와 조각, 그리고 사진과 다큐멘터리 등으로 구성되었다.

'108개의 면과 36개의 시선, 또 다른 한 개의 눈'(2019)에서 제목 그대로 108개의 시선을 제시했다. 작가가 삼각형으로 된 만화경 36개를 이어 붙여 5각형의 별 모양으로 형상화하였다. 만화경들에는 현실의 상이 투영되지만, 다른 각도의 시점에서 본 형상들이 서로를 반사하면서 셀 수 없이 다양한 상들이 맺히게 된다.

임선이는 이처럼 단일한 상으로 귀결될 수 없는 연속적 이미지를 통해서 시간의 흐름이 개입된 다층적인 시선을 제시한다.

‘녹슨 말’ 상들리에 LED조명 FRP 소금 등 설치가변 2019

임선이는 2021년 개인전 <품은 시간과 숨의 말 floating Time, breathing Words >에서 흰 벽과 소금이 깔린 바닥으로 새하얀 공간 속에 오래된 샹들리에들을 설치한 작품 <녹슨 말>을 내 놓았다. 샹들리에들은 약 6분간 천천히 점멸을 반복하는데, 깜빡이는 불빛들이 마치 느린 호흡과 말( words )같다. 작가는 젊음을 지나 점차 느려져 가는 노인들의 시간을 표현했다.

샹들리에가 마치 호흡하듯 켜졌다 꺼졌다 하는 설치 작업은 시간의 흐름 그대로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있다.

모델들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던 1980년대를 표현하고자 낡은 샹들리에를 구해 수작업으로 크리스탈 조각을 이어나가며 만들었다. 부분부분 부착된 단어들은 작가의 아버지가 실제로 남긴 메모에서 가져온 것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는 조명의 느린 호흡으로 인해 흡사 뜨문뜨문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인다.

임선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현시대의 변화와 양태를 바라보고 이를 독특한 이미지의 ‘풍경’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조각과 설치, 사진의 영역을 넘나들며 해오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따라 매체를 선택할 뿐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