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철판을 뚫는다? ‘칸트의 산책길’에서

[ 황현탁 워킹데이트 ]

2021-07-11     황현탁 여행작가

양재천에는 2017년 10월에 조성된 ‘칸트의 산책길’(Kant’ promenade)이 있다. 냇가 좀 높은 곳에 ‘인공섬’을 만들어 건너는 다리(bridge)를 놓고, 그 섬에 개울을 등지고 다리(leg)를 꼬고 책을 펴고 벤치에 앉은 ‘칸트상’을 앉혀놓았다. 칸트 좌상(坐像) 좌우로는 냇가 쪽을 향해 앉을 수 있는 등(背)이 비스듬한 의자 2개와 둥그런 들마루가 있고, 좌우와 앞쪽에 2인용 벤치가 놓여 있다. 

(사진=황현탁)

그를 만나려면, 가는 길에 세워진 둥글게 구멍이 뻥 뚫린 철판조각을 통과하여, 2미터도 안 되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칸트상이나 철제조각은 누구의 작품인지 설명문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철판에는 “칸트의 산책길은 자연과 사색을 통해 나, 너, 우리를 돌아보고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란 글귀가 씌어있다. 사람을 통과시키기 위해서일까, 둥글둥글 주변을 살펴 제대로 사유하고 명상하란 주문일까, 철학은 철판을 뚫는 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일까 뭔지 모르겠다.

칸트는 평생 동안 고향인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은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에서 150km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허약체질이었는데, 규칙적인 산책으로 건강을 유지했다고 한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읽느라 시간을 어긴 것을 제외하고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산책에 나서 주민들이 산책하는 그를 보고 시계의 시각을 맞추었다고 할 정도로 ‘정확한’ 사람이었단다. 

칸트 옆자리는 비어있다. 함께 앉아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거나, 양재천을 거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주변의 의자나 벤치, 들마루에서 칸트나 칸트옆자리에 앉는 사람들을 볼 수도 있고, 냇가에 심어놓은 나무나 푸성귀, 냇가나 잔디밭을 찾는 참새나 까치 등 동물이나 자연현상을 보면서 ‘사유’할 수도 있다.

(사진=황현탁)

2021년 봄에는 냇가 바닥을 정비하여, ‘물소리가 들리도록’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시원한 느낌을 준다. 사람의 소리는 명상에 방해가 되겠지만, 자연의 소리는 ‘잡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하는 중화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 옆 빈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분에게 증명사진을 부탁했다. ‘독일계민족’의 역사를 모르니 ‘프로이센’왕국 출신인 칸트가 왜 독일 사람으로 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또 ‘철학’책들을 가까이 한 적이 없어 순수이성, 실천이성 그런 단어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다. 철학은 왠지 어렵고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열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의자에 앉아 물소리를 듣고, 새들을 응시하며, 의자나 들마루에 있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행복할까? 사색도 명상도 아닌 쓰잘 데 없는 상념에 젖는다. 내 나이에는 ‘멍 때리기로 정신을 쉬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진=황현탁)

칸트는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누구든 이 세 가지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세상에는 의미 없는 일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말아야할 사람을 사랑하고, 망상을 희망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로 들리지만, 행하기가 쉽지 않음을 칸트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양재천을 따라 성업 중인 ‘카페거리’의 멋진 카페에 들러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하고 싶어진다. 다음에는 매사를 심각하게 대하는 친구나, ‘글 쓰는 친구’와 같이 나들이 해야겠다. 칸트처럼 매일 정해진 시간이 아닌 기분 내킬 때.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