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엄혁용, 날아와 꽃힌 영혼과 마주하다
전시 '사고하는 존재', 전주 '아트이슈프로젝트'서 7월 31일까지
2021년 전북 전주에 개관한 상업갤러리 아트이슈프로젝트(대표 한리안)가 2022년 ' 동학(東學) 정신 예술로 태어나다'를 주제로 기획한 두 번째 전시 <사고하는 존재> 엄혁용 개인전이 지난 6월 19일 시작되었다.
전시 작품들은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하고 있는 '碑-시간 속으로', '사유의 공간' 시리즈이다. 1994년부터 시작된 '碑-' 시리즈는 몇 가지 재료들의 조합을 구성하는 '관계'에서 의미를 찾아 사유케 한다.
1987년 발간된 복거일의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는 우리나라가 여전히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다는 가상의 역사를 세워 말과 역사가 말살된 상황에서, 주인공이 민족과 뿌리를 어렵게 찾아내고 그 때문에 가해질 핍박을 피해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망명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엄혁용과 복거일이 말하는 비(석)는 육신이 소멸된 존재이기도 하며, 세상을 떠난 조상의 혼이 현재의 가족을 수호해 달라는 제의의 상징이다. 과거, 미래, 현재를 관통하는 공간과 함께하는 물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유의 공간'은 고서적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하늘을 나는 책 위에 올라가 있는 자동차, 한국의 전통 책장인 서가도(書架圖)와 강아지, 장정되지 않은 너덜너덜해진 종이, 사물인 책의 모서리 부분 - 세네카 : 책등 - 이 포개어져 마치 사람의 눈인듯 관객을 바라보는 그림 등. 한지로 만든 천자문 책자를 찢어 부조와 설치 작품으로도 확장한다. 책을 소재 및 주제 심지어 재료로 한 작품은 수없이 많다.
엄혁용은 1992년 첫 개인전 이후 끊임없이 다양한 변화를 모색해 왔다. 변화는 재료, 작업 기법, 설치 및 전시 방법, 내용과 의미까지 광의적이다. 맥락은 ‘날것의 예술’ (타시즘, tachism)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다.
2010년대에 본격화된 책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는 재료가 나무에서 알루미늄으로 바뀌었다. 알루미늄은 심하게 문지르면(sand) 차가운 물성이 없어진다. 작품의 표면은 마치 금속에 시멘트와 몰타르를 섞어 바른 듯 했다.
엄혁용의 조각은 회화적으로는 비정형(inform)이다. ‘앵포르멜’은 형(form)을 부정(in)한다. 작품들은 마치 회색 물감(impasto)에 구체적인 형상의 오브제를 넣어 시각적이며 촉각적인 질감을 드러낸다. 그러한 ‘평면스러움’이 입체와 결합한다. 빵에 건포도가 박힌 것 같지 않나.
녹슨 타자기가 알루미늄 판에 박혀 있다. 타자기는 1970년대~1980년대 산업화 시대 사무 공간의 상징이다. 작가는 특정 시간대를 옴짝달짝하지 못하는 사막 가운데 융기한 화석 같은 돌로 본다.
‘건포도 빵 모형’은 건포도가 두루 박힌 빵처럼 양전하 요소와 음전하 전자가 뒤섞였다는 물리학의 원자 모형이었다. ‘건포도 빵’ 모형은 틀렸음이 곧 입증되었다. 원자는 무거운 원자핵이 중심에 있고 그 주위를 전자들이 마치 태양계의 행성처럼 돌고 있다고 밝혀졌다.
엄혁용은 막 30대에 접어든 1991년 중앙미술대전 종합 대상을 수상했다. 장르가 통합된 첫 해였다. ‘청년 급제’가 작가로서는 독이었다고 말한다. 신소재인 알루미늄의 물성을 드러낸 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금속은 대체로 비중이 높아 열을 가하면 연성이 되는데, 물에 뜨는 비중을 가진 알루미늄은 재질이 깨진다. 가격이 저렴하기도 했다.
1992년, 첫 개인전은 문자와 기호의 조형성과 확장성에 몰입하였다고 평가받았다. 미술대학 학생이었던 J는 이 전시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조각은 머리와 팔다리가 생략된 토르소가 전부였다. 조각이 형태와 볼륨을 가진다는 보편적 예술 언어를 깨뜨린 것이다.
J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엄혁용의 작업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작가의 지난 전시 도록을 살펴보다 당시 작품의 주인공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기도 했다.
필자는 작가들의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인 앙띠미떼(intimité)를 추적하고 예측해 보려고 애쓴다. 작가와 작품 세계의 상관 관계를 알기 위한 목적이다. 작가를 온전히 드러내는 작품이어야 앙띠미떼가 보인다. 작가들은 종종 자신의 트라우마를 대중을 끌어들여 작품의 주제로 삼기도 한다.
1992년 전시는 7년이 지나 ‘관음증-다이어리 엿보기’로 이어진다. 작가는 연령별, 직업별 여성 20여명의 다이어리를 2년에 걸쳐 구했다. 어느 한 사람의 다이어리 한 달치 각 페이지를 20∼30배 확대해서 강화유리에 새겼다. 관객이 작품 앞 벤치에 앉아 다이어리를 보는 것 자체가 작품의 완성이었다.
전시 ‘관음증’과 같은 맥락에서 2000년 서울 지하철 7호선 개통 때 ‘화장실에는 환희가 있어요’라는 주제로 작품을 선보였다. 의자에 수세식 변기 모양을 프린트한 시트커버를 부착하고 화장실 낙서를 패러디 해 광고판에 꽂기도 했다. 의자에 앉으면 화장실에서 일 보는 소리도 나며 손잡이는 악수하는 형태로 만들었다. 천장에는 화장실 유머와 낙서를 패러디 한 ‘엄혁용 잠언집’을 선보였다.
누군가의 생각과 행동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행위와 같다. 행위의 주체는 상자의 내용물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 설치 미술로 드러낸 것은, 대중이 내뱉은 날 것의 흔적을 수용하고 이해하려는 행위이기도 하다.
영국 여성 작가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1963~ )은 1988년 자신이 겪었던 폭력적인 경험들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내면 깊숙한 트라우마와 이별할 수 있었다. '내 침대(My Bed)'는 자신이 쓰던 침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주변에는 스타킹, 속옷, 콘돔, 피임약 등 성(性)적인 사생활을 암시하는 오브제가 널려 있었다. 영국 현대 미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려는 성향을 '억압' 때문으로 본다. 그 행동은 일종의 '반복 강박'이다. 과거의 무의식 영역이 현재로 터져 나오려는 게 '반복'이다. 엄혁용의 동일 주제에 대한 반복은 질 들뢰즈로 어느 정도 설명되어지는 듯 하다.
2003년 2월, 엄혁용은 서울 성곡미술관에서 미술과 극(劇)을 접목한 '사이코드라마'전에서 정신성과 극적 형식을 미술의 감성과 결합해 인간심리를 표출하였다. 치유는 자신 안의 또 다른 어린 나를 끄집어 내고 그와 화해하는 과정이다. 전시는 엄혁용이 미술교육자로서, 상처입은 대중을 대상으로 예술 치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03년 4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까는 방석, 등받이 방석 등 보료라는 한국의 전통적인 일상의 사물을 본떠 철 조각을 선보였다. 폭신폭신한 실제 보료와 작가가 창조한 철 보료의 공존 현장을 보고 느끼게 하였다.
<교실 풍경은 어떤가요? 교탁이 교실 가운데 우뚝 서 있고 교단은 학생들을 내려다볼 수 있게 높습니다. 과거 서당은 달랐습니다. 훈장 선생은 보료에 앉을 뿐입니다. 동양에서 학문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주체였어요.>(이어령 1934~2022)
일제 시대에 들어온 교단과 교탁, 이전 시대 서당의 보료를 대비시켰다. 그러나 장소가 바뀌어 어느 기와 집 안 방 보료 뒤에 병풍이 쳐지고 보료 앞 자리에 술상이 차려지고 옆 자리에 젊은 여성이 앉으면 보료는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로 그 위상이 달라진다. 솜이 두텁게 들어간 요 또한 그 대체물이기도 했다. 보료는 오늘날 보편화된 침대에 해당하기도 한다. 트레이시 에민의 <내 침대>와 보료가 오버랩 된다. 요는 침대로 치면 매트리스에 해당한다. 엄혁용은 이러한 사물을 동일한 형태와 볼륨을 가진 철제로 만들었다.
엄혁용은 2011년 11월말. 일명 '직지 대모'인 박병선(1929~2011) 박사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현충원에 안치됐을 때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직지(直指)는 1377년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금속활자본이다. 현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만이 존재한다.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 서양의 인쇄 문명을 발달시킨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섰다. 직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목판 활자본이 있었기에 금속활자본이 존재할 수 있었다. ‘직지’를 주제로 작품을 하기로 결심했다. 엄혁용은 이미 그 2년여전부터 나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작가는 아이들에게 동화를 자주 읽어주다 나무를 깎아 책을 만들어 선물했다. 금속활자본인 직지는 결국 종이이고, 종이는 나무를 재료로 하기에 그 맥락이 닿았다.
미술사가 오주석(1956 ~ 2005)은 그의 역저 <한국의미 특강>에서 조선말 일제강점기에 걸쳐 이 땅의 핵심문화재 2만여점이 해외로 유츌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필자가 엄혁용 작업실에서 마주한, 어디선가 책들이 날아와서 나무에 꽂힌 듯한 작품은 이렇게 말하는듯 했다.
“무엇을 잃어버리고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 않느냐”
엄혁용이 직지를 마주한 것은,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말과 역사를 찾은 장면을 현실에서 맞닥뜨린 것과 같았다.
엄혁용은 합판, MDF, 원목 판재인 집성목 등을 피하고 통나무 자체를 사용한다. 작가는 재료로 느티나무를 좋아하나 소나무, 밤나무, 감나무, 팽나무 등 수종을 가리지 않는다. 벌레 먹고 썩은, 자연 고사된 나무를 체인톱으로 자르다보면 뽀얀 속살이 드러난다. 나무를 가공하면서 물성이 가진 ‘사각사각’, ‘톡톡톡’ 같은 소리를 접하는 게 좋았다.
2011년, 2012년 연속으로 <직지(直指), 새로운 천년의 꿈을 꾸다> 를 타이틀로 세 번의 전시에 소개한 작품들은 한지를 사용하였고 상감기법으로 만들었다. 엄혁용은 나무가 갖는 질긴 생명력이 직지와 어떻게 하나가 되는지 고민했다. ‘직지’ 시리즈는 나무, 돌, 청동으로 만든 작품으로 다양화해갔다.
직지 시리즈는 책을 원하는 만큼 빼내고 책장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 작품 곳곳에 작은 크기로 홈을 파 종이찰흙 같은 물 한지를 넣기도 하고, 고서를 도첩하듯 실리콘으로 책 조각을 제본했다. 꽃과 얼굴도 새겨 넣었다.
나무 책들은 눕혀지고 세워지고 쌓이거나 책 나무에 과일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 등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내었다.
작가는 작품을 가구로 설정하는 유혹을 피하고자 마감처리를 하지 않고 나무의 물성에 충실하였다. 그의 작업실에는 책꽂이, 책상의 기능을 갖춘 작품들이 있다.
작가는 작품의 변주 때 마다 테이블을 만들었다. 왜 그런지를 물었다. 작가는 5남매중 막내이다. 어릴 적 책장은 형과 누나의 차지였다. 식탁용 소반이나 앉은뱅이 호마이카 상을 어쩌다 차지하거나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아야 했다. 테이블 높이는 어릴 적 공간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한계였다.
2014년 ‘완판본, 세월의 책 꽃이 되다’라는 주제어로 전시를 가졌다. 그는 책에 5개의 구멍을 내 속지, 표지 등을 고정한 오침안정법을 쓴(전주판소리)완판본 책 조각에 민화의 초충도(草蟲圖)를 접목, 나무, 꽃, 나비, 구름 등을 음각·채색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동(銅)으로 만든 3m40㎝ 높이의 책 탑에 나무로 조각한 완판본이 올려졌다. 금속과 나무를 접목해 자연과 산업을, 과거와 현재를 연결했다.
2015년 전시에서는 금속 소재를 주요 작품으로 배치했다. 재료에 대한 회귀였다. 전시장 한 벽면을 5~20㎝ 길이의 책의 조각 900여개로 채운 설치 작품이 인상적이다.
초기 작품 대부분은 금속을 재료로 사용하였고, 알루미늄과 철, 철과 강화유리, 도자기 조각(陶彫), 스테인리스스틸을 거쳐 나무로 넘어왔다. 엄혁용은 사물의 외형보다는 물성 자체를 탐구하는 맥락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미술교육자의 역할에도 큰 비중을 둔다. 후배나 제자들이 밀도 있고 노동을 필요로 하는 작품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아쉬워했다. 그는 책을 한 권 한 권 만들어 조립하고 짜맞춘다. 땀을 많이 흘리면서 몰입하는 것을 좋아한다.
금속 작업은 막노동이나 다름없어 학생이나 기피하는 흐름을 되돌려 놓았다. 엄혁용은 학교에서 마땅히 기본적으로 배워야 될 것이 있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제자들이 쉽게 영상이나 미디어 아트로 옮겨가는걸 경계한다.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미술 생태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친다.
J는 30여년전 서울의 대학 캠퍼스에서 민소매 입은 여학생들이 용접하는 광경을 전북대에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수년 전 입학 경쟁률이 미달이었던 조소과는 5:1을 넘고 있다.
<조각을 전공한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 있다. 제자들의 창작 열정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부재한 지역의 문화 환경이다. 조각은 공간성과 장소성이 확보되어야 작품의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다. 전주는 야외 전시공간(조각공원)은 전무하다. 야외 조각공원(혹은 지붕 없는 미술관)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조형물들은 회색의 도시를 생동감 있게 변화시키고, 장소가 갖고 있는 역사와 힘을 기억하게 해주는 통로도 된다.>(2018년 7월 칼럼-엄혁용)
조각가이며 미술교육자인 엄혁용은 도시 곳곳에 아름다운 미술품이 놓인 거대한 야외미술관. 자전거를 타고 한옥마을과 전라감영과 객사, 풍남문을 거쳐 남부시장에서 미술품을 만나고, 팔복동 예술공장의 예술품들과 대화하며 덕진공원과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쌈지공원과 천변 길에 설치된 작품들로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꿈을 꾼다. 전시 <사고하는 존재>는 7월 31일까지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