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 저항시인 김지하 떠나다

2022-05-08     이대 기자
2014년 11월 10일 서울 종로구 안국동 수운회관 대교당에서 열린 저서 '아우라지 미학의 길', '초미(初眉)', '수왕사' 등의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김지하 시인. (사진=뉴스1)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으로 1970년대 대표적 저항시인이자 민주화 시인으로 불렸던 김지하 시인이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김지하 시인은 최근 1년여 동안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투병 생활을 해왔다.

본명이 김영일인 고인은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1954년 강원도 원주로 이사해 소년기를 원주에서 보냈다. 1959년 서울 중동고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 미학과를 나왔다. 1963년 3월 ‘목포문학’에 ‘저녁 이야기’라는 시를 발표했는데, 김지하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했다.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 ‘비’ ‘녹두꽃’ 등의 시를 필명 김지하로 발표하면서 공식 등단했다. 

김지하 시인은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다가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등단 직후인 1970년에는 ‘사상계’에 판소리 가락을 빌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날카롭게 풍자한 ‘오적’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김 시인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해야 했고, 사상계는 폐간됐다. 이른바 오적 필화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지하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돼 사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가, 국내외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으로 10개월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같은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고 고발하는 글을 언론에 발표했다가, 다시 투옥돼 1980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날 때까지 1970년대 중후반 6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타는 목마름으로’로 1975년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올랐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을 받았다. 1981년에는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수상했다. 정지용 문학상(2002년), 만해대상(2006년) 등을 수상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생명사상에 심취해 작품 세계가 변화를 보이면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상상력으로 많은 시를 쏟아냈다. '남(南)'(1984) '살림'(1987) '애린 1'(1987) '검은 산 하얀 방'(1987)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나의 어머니'(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화개'(2002) '유목과 은둔'(2004) '비단길'(2006) '새벽강'(2006) '못난 시들'(2009) '시김새' (2012) '흰 그늘'(2018) 등의 시집을 남겼다.

김 시인은 1991년 명지대 학생이던 강경대군 치사 사건 이후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대학생들의 분신 자살이 이어지자,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써 ‘변절 논란’을 빚었다. 이 일로 1970년대 그의 구명운동이 계기가 돼 결성됐던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에서도 제명됐다.

2001년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칼럼과 관련해 사과의 뜻을 표명하면서 민족문학작가회의 문인들과 한때 화해의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공개 지지 선언하고 이후엔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문학계 인사 등을 매도하고 비판하는 등의 행보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김 시인의 부인은 대하소설 ‘토지’를 쓴 소설가 고(故) 박경리의 외동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김 이사장은 2019년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작가)씨와 차남 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학관 관장)씨가 있고,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