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인간을 포착한다' - 김수나 작가
용인 수지에서 출발한 택시는 도심과 근교를 번갈아 넘나들며 트인 공지(空地)로 접어들자 뭔가를 막 파종한 듯한 밭을 돌아 바로 도착했다. 김수나 작가가 입주한 수원시 권선구 창작스튜디오 개인 작업실에는 벽면 한 가득 제법 묵직해 보이는 장비 박스들만 가지런했다.
1920년대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와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가 시작한 큐비즘(cubism)은 신문지, 잡지 등 '오브제(objet)'를 찢어 붙이는 파피에 콜레(papier collé)에서 시작되었다. 정육면체'를 말하는 '큐브(cube)'에서 나온 큐비즘은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통째로' 보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한다. 파피에 콜레가 발전하여 콜라주(collage 붙이기)가 되고, 다시 아상블라주(assemblage 모아 만들기)가 된다.
현대에도 호크니(David Hockney. 1937 ~ )가 평면에 다각도의 시점과 수백 장의 사진을 디지털 작업으로 결합한 사진(photographic collage) 작업 등으로 이어간다.
버려진 금속부품이나 밧줄, 나무 같은 것들을 조합해 완성하는 아상블라주 기법의 확산은 1960년대 미국의 네오다다(Neo-Dada)와 유럽의 누보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에서 두드러진다. 아상블라주는 3차원 콜라주이다. 평면에 ‘찢어 붙이기’(콜라주)하던 것을 공간에서 한다는 말이다.
김수나는 국내 학부 시절에도 굳이 묘사가 필요 없는 경우는 콜라주로 표현하였다. 졸업전 때 지도교수인 서양화가 이두식(1947~ 2013)은, 김수나 작품이 전시된 전시장을 둘러보고서도 ‘작품 어딨니?’라고 말하였다.
작가는 독일에 14년여간 체류하였다.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를 졸업하던 해인 2014년 발표한 ‘골든 마운틴’(Golden Mountain, 나무, 석고, 대리석 무늬 스티커, 스프레이, 30x26x93cm), 2016년 발표한 ‘생강처럼’은 석고나 스프레이와 같은 재료의 비정형적인 특성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스스로 고정된 형태를 가지기 보다, 주변 환경과 상호 작용하면서 다양한 상태로 변화되는 물질의 모습 또는 상황 자체를 작품으로 담아냈다.
김수나는,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 교수를 지낸 조각가 파울 이젠라트(Paul Isenrath)가 학교 행사에 초청받아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는 조수 머리 위로 주전자 물을 붓던 퍼포먼스를 기억해냈다.
10년마다 열리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ünster)는 볼 수 있고 만질수 있는 열린 방식으로 대중과 만난다.
김수나는 2017년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집 근처이기도 했던 운하 일대 다리 옆에 마이클 스미스(Michael Smith)가 오픈한 타투 숍‘Not Quite Underground’을 기억한다. ‘몸에 새겨져서 자연스러운 무언가처럼 이 도시에서 조각은 그렇게 새겨진다’는 뜻으로 읽혀졌다. 몸에 대한 관심이 조각의 영역을 확장시키며 젊은 세대의 문화인 타투를 올드 에이지(65세 이상 할인)와 나누는 참여형 퍼포먼스로 이해한다. 모든 퍼포먼스는 신체가 매체가 된다.
작품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험도 했다. 도로 공사장과 공사 과정을 작품으로 알고 접근했으나 진짜 공사였다. 의미있을지 모른다고 반응하도록 하는 게 예술의 힘이다. 김수나는 예술이 가질수 있는 힘과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행사 아니냐고 반문한다. 현지 유학생및 뮌스터 시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프로젝트를 두 번이나 경험했다.
김수나는 2022년 2월, 전주 팔복 예술 공장에서의 전시, <시선의 번역>전에 <Reflection N> 시리즈를 발표했다. <Reflection N> 시리즈에는 3~5가지 레이어가 형성되어 있다. 껍질, 내장, 보석, 거품 등 다양한 이미지들이 혼합되어 있다.
2021.12 ~ 2022. 2 경기도 안산 단원미술관에서 선보인 <풍경의 층>은 설산(雪山)의 풍경과 눈밭의 이미지를 이용했다. 겹겹이 쌓인 설산 이미지는 부분적으로 찢어지면서 거친 종이의 질감을 드러내며 다른 이미지와 섞이며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김수나는 오브제로 자연 현상을 담은 책이나 잡지의 사진을 활용한다. 선택된 사진을 여러 방향으로 접어 생긴 주름으로 특정한 면을 보여주거나 종이의 표면을 칼로 긁어내, 하나의 표면이 다르게 보이는 흔적을 보여준다.
설산의 표면에서는 쌓인 눈이 녹아서 지층으로 흡수되고 다시 수증기나 구름으로 뿜어져 설산의 주위를 에워싼다. 바닥 카페트의 질감은 논밭을 연상케 하고, 거친 종이의 재질을 느낄 수 있다.
형태적으로는 언뜻, 수년전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역로인 중국과 티벳 사이의 높은 ‘차마고도’(茶馬古道)를 찍은 텔레비전 영상 다큐멘터리에 비친 험준하고 좁은 길(險路)이 드러나는 듯 했다.
험로는 일종의 동영상에서 본 이미지와의 연상 작용에서 생각해 낸 것이다. 이미지는 눈으로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몸 동작에도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필자는 땅콩 버터를 좋아한다. 마트에 갔다가 미국산 스키피(Skippy)가 눈에 띄였다. 플라스틱 통에 든 땅콩버터와 병에 든 쨈을 샀다. 단골 빵집에 가서 식빵을 사와 그날 저녁 디저트로 버터와 쨈을 발라 먹었다. 다음날 강북 서촌 일대에서 저녁 약속을 마치고 지하철역 가는 길에 근사한 빵집이 보여 통밀빵을 사와 버터와 쨈을 발라 먹고 빵을 다시 포장하기 위해 봉투 끈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어제 산 식빵은 포장지를 끈으로 묶는거였고, 통밀빵은 테이프로 붙이는 거였다.
스키피 땅콩버터가 제조 과정 중에 쇠조각 파편이 들어가 리콜을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내가 사온 땅콩버터는 알고보니 리고(Ligo)였다. 리고는 캐나다산인데 상표 디자인에 미국 성조기가 들어가 있었다. 필자의 몸은 이틀 동안 몸이 스키피든 리고든 구별하지 않고 미국산 땅콩버터를 먹고 있다는 인식 뿐이었던 것이다.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가는 사진 표면을 찢었을 때 드러나는 물성과 함께 내부와 외부가 뒤섞여 이미지 소비자인 관객의 의식이 사진에서 전달되는 풍경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관객은 작품과 어울린 전시 공간의 아우라와 함께 체득한다.
“외부공간은 내 신체의 외부로 향한 모든 표면의 합이고, 그런 표면과 외부 세계가 접촉해서 일으키는 공명이 나의 내부를 채운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장소에 가깝고 사건에 가깝다.(...)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대상과 외부세계가 만나는 표면이다”(작가노트 중에서)
이틀 동안 필자의 몸은 움직이는 장소였고 동작을 하는 사건 자체였던 셈이다.
사진 이미지의 표면은 이미지 정보를 담고 있으면서 물질인 인화지의 부분이다. 이미지 정보는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가치를 증폭시킨다. 작가는 이와 동등하게 물질로서 표면을 같이 바라보고 싶었다. 표면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며,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말한다.
표면이 명백한 가짜인 경우도 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조각가 강진모는, 최근 장모님을 위해 떠난 이탈리아 로마 여행에서 ‘표면은 가짜이다’고 말한다. 로마의 수많은 교회 건축물들이 기둥의 표면만 화려한 돌로 덮어 씌운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통돌은 돈이 많이 들기에, 돌처럼 보이게 하려고 기둥에 돌무늬를 그려넣었다.
필자는 ‘설치’라는 미술 영역에 관심을 두었으나 작가는 막상 장르와 방법에 대한 강박이 일체 없다. <풍경의 층>에 대해, ‘여러가지 재료를 혼합했으나, 미술사적 맥락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기에 매체적 정의인 아상블라즈는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답했다. ‘설치’라는 장르에 걸맞는 작품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작품은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2021년 전주 팔복예술공장 레지던시 작업의 하나로 ‘환상지’(Phantom Limb)를 발표했다.
작가는 환상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신체의 일부에서 어떤 통각을 느낀다고 착각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일련의 '몸 정체성'이라는 관심사와 관련된 작업으로, 현재 작업의 출발점이다. 2013년에 구현된 작품을 변환하여 2021년 팔복에서 다시 선보였다.
작동하는 ‘선풍기’를 오브제로 사용한 작업은 현장성, 사건성이 중요하다.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관객인 필자는 느와르 영화의 이미지와 공간에서의 소음이 연상되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소리였다. 날개를 떼거나 보호망을 벗겨낸 전시장 공간에 작동하는 여러 대의 키 낮은 선풍기 모터 소리는 땀내나는 홍콩 거리를 무대로 한 영화의 무술 고수들만이 연출가능한 부드러운 동작들을 연상시킨다.
2010년초 필자가 방문했던 중국 베이징 다산쯔(大山子) ‘798’ 예술특구의 중심 전시장인 UCCA에는 중국 작가 양후동(Yang Fu dong)의 작품이 자리 잡고 있었다. DVD 대신 수십 대의 키 높은 35mm 극장용 영사기(cinematograph)가 각각의 흰색 스크린에 흑백의 느와르 장르의 영화를 쏟아내고 있었다. 수십 대의 프로젝터인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는 스펙터클 그 자체였다.
2020년 안산단원미술관 ‘초대거부’전에 발표한 ‘솔루션’은 석고의 특성상 쌓이고, 흐르고, 고이는 현상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사각 테두리로 구조적 요소를 만들었다.
작품에 대한 평가와 느낌은 다르다. 느낌은 비언어적이지만 평가는 언어적 표현이 따른다. 필자는 느낌을 ‘집합적’이라고 표현했다. 작가는 평가 이전의 느낌인 언어를 테두리라는 구조적 요소로 이해했다.
작품 ‘솔루션’은 바닥에 놓였다. 벽이나 벽면을 이용한 공간에 거는 작품은 대개는 놓이는 작품보다는 가볍다. 놓인다는 것은 무겁다는 의미도 된다. 작가에게 사각의 테두리는 필자에게는 아상블라주로 보인 작품들을 정형화시키는 판넬로 보였다.
작품 ‘솔루션’의 오브제는 석고와 먹이지만 이들은 액체로 수평 흐름을 멈춘 고형(固形)이다.
2020년 대부도 경기창작센터 <0인칭 시점>전에서 발표한 ‘무제’(Untitled)는 그을음을 표현했다. 그을음은 불로 인해 생기는 흔적으로, 대게는 평범한 일상이 아닌 어떤 불의의 사고가 일어난 현장에서 볼 수 있다고 추정한다. 또한 불은 무언가를 화학적으로 변화시키기에, 이러한 사건을 겪은 대상이나 공간은 그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실제 전시로서의 (지하 주차장 같은) 조건이자 연출된 벽면의 그을음과 상호작용하는 공간은 시간이 지나 시각적으로는 기둥이 주인공이 된 듯 기록되어 있다.
작가는, 그래서 그을음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서 막연한 공포감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또렷하게 분석하거나 대처할 수 없는 현상·사건으로부터 오는 모호한 공포감을 전시 공간 안에 연출해 보았다. 김수나 작가에게 그을음은 이미지인 동시에 사건이기도 하다.
작가의 사고의 전이 과정은 논리적이며 추정적이다. 그을음은 실체를 덮은 표면이 되기도 한다. 조각가 강진모는 장모님을 위한 로마 여행에서,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천장화는 오랜 세월동안 단색화로 알려져 있었다. 수백년 동안 타오른 촛불과 난방을 위한 장작불들이 만드는 연기에 까맣게 그을렸기 때문이었다” 고 말한다.
“그을음 세척 후에 드러난 '천연색' 천지창조는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천재적인 '색채화가'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미켈란젤로의 천정화는 수백년동안 단색화라고 믿어졌다”고 말한다. 그을음 자체가 김수나 작가가 천착하고 있는 ‘표면’인 셈이다.
김수나 작가는 귀국직후부터 연속적으로 세 번째 관립(官立) 레지던시(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했다. 한결같이 관(官)은 엄격한 심사를 통해 예술가를 입주시켜 놓고, 자신이 예술가임을 증명하라는 서류 작업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도 원한다.
작가는 레지던시를 떠나고 나서야 창작의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 스튜디오의 장소성이나 시기 등에 영향받은 작품을 다음 번 공간에서도 작업이 가능한 것이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