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마선언으로 본 윤석열과 이재명
[윤석규 정치 맥점을 짚다]
양강으로 꼽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이재명 지사가 연이어 대통령 출마선언을 했다. 같은 점도 보이지만 당연히 차이가 훨씬 크다. 이틀 앞선 윤석열의 출마선언에 대해선 이미 많은 평가가 나왔다. 이재명의 출마선언에 대한 평가도 이어질 것이다. 유권자의 바른 선택을 위해 각각에 대한 면밀한 평가가 우선이지만 둘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듯하다. <편집자 주>
윤석열, 보수 유권자 보다 중도층 먼저 겨냥했어야
비교에 앞서 윤석열의 출마선언에 대한 기왕의 평가들을 살펴보자. 여야 양 진영의 입장에서 내리는 평가들은 귀담아들을 가치가 없다. 극단적 비난이거나 상찬 일색이다. 진영에서 자유롭고 지지여부를 떠난 평자들의 이야기가 중요하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보수적 정체성과 콘텐츠 부족이다. 평자들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기존 야당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고, 안보관련 스토리를 앞머리에 배치한 것, 불평등이나 비정규직과 같은 사회경제 문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 등에서 그의 보수성향을 읽었지만,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본인 스스로 ‘국민의힘과 정치철학이 같다’고 밝힌 대목에서 어렵지 않게 그와 같은 판단을 내린 듯하다. 크게 무리가 없다.
출마선언문에 담긴 보수적 색채가 그의 본성과 전략적 선택 가운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하다. 본성을 가감없이 드러내 솔직해서 좋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달리 말하면 전략의 부재를 뜻한다. 대선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보수적 유권자를 먼저 소구하겠다는 전략이라면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중도층과 무당층이 일부 무관심한 유권자도 포함하지만 스윙보터(swing voter) 나아가 스마트 유권자(smart voter)의 특성을 지닌다고 분석한다. 진영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이지 않고 이슈와 가치에 입각해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윤석열 스스로 밝혔듯이 중도층과 합리적 진보까지 포괄해 압도적 승리를 거두는 것이 목표라면 첫 공식 행보에서 그들을 먼저 겨냥해 자신의 확고한 지지층으로 묶어두는 전략을 취했어야 했다. 입당 또는 단일화를 통해 야권 단일 후보가 된다면 오른쪽 유권자는 달리 갈 곳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평자들이 자유의 소중함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을 보수와 연결하려는 것은 핀트가 많이 엇나갔다. 오랜 기간 한국의 보수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주의와 시장만능주의로 환치시킨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인다. 자유민주주의의 본 뜻은 다르다. 현대 민주주의 탄생 초기에 지도자들은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다수 독재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지혜로운 융합의 결과물이다. 미국 민주당의 이론가 레이코프는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에서 자유가 본래 진보적 가치라 주장하며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말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인용한다. 윤석열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를 통해 집권세력이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고 시도한 것만이 아니라 국회 다수의석을 가지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정치행태를 아울러 비판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가 협애하지 않다는 사실은 ‘경제적 기초와 교육 기회가 없는 자유는 공허’, ‘승자독식은 절대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한 연대와 책임’ 등의 표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윤석열 키워드 ‘정권교체’ vs. 이재명 키워드 ‘이재명’
윤석열의 출마선언이 내용도 그렇지만 형식에서 정치 아마추어티를 감추지 못했다면 이재명의 출마선언은 세련미가 넘쳤다. 비대면 형식은 코로나와 초연결사회에 걸맞는 좋은 선택이고, 배경 영상도 매끄럽다. 윤석열은 외교문제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면 정책이라 이름붙일 만한 내용이 거의 없는데 비해 이재명은 여러 정책 방향을 두루 언급한다. 윤석열이 ‘분노’, ‘약탈’ 등 감정이 담긴 선동적인 언어를 구사한데 비해 이재명은 평소와 달리 매우 정제된 표현을 사용했다. 야권후보와 여당 후보로 입지가 달라서 그렇기도 하다.
이런 외형적 차이를 넘어 두 사람의 출마선언문을 극명하게 가르는 것은 두 사람이 제시한 키워드다. 윤석열은 ‘정권교체’고, 이재명은 ‘이재명’ 자신이다. 두 키워드에서 두 사람의 현실인식과 선거전략까지 엿볼 수 있다.
윤석열은 줄기차게 공정과 법치를 강조한다. 우리의 현안을 해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데도 공정과 법치는 필수적인 기본 가치다. 심지어 과학기술과 경제 사회 제도의 혁신도 공정 및 법치와 연결한다. 공정과 법치를 빼면 국정운영에 대한 철학도, 한국정치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구상도 없다. 전략도 없다. 공정과 법치를 무너뜨린 현 정권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정권교체를 하자는 말 뿐이다. 현 대통령제의 한계에 대한 성찰이 없고, 한국정치의 재구성에 대한 기획은 당연히 없다. 구체적인 전략이 없는 까닭에 현 정권을 비판할 때 보인 직설적이고 날선 언어가 향후 본인의 정치적 진로와 국민의힘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만나면 모호해진다. 첫 행보인 점을 감안해도 매우 허술하다. 과연 정권만 교체하고, 공정과 법치를 바로 세우면 대한민국의 문제가 다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재명의 출마선언의 첫 대목과 마지막 대목을 장식한 구호는 ‘새로운 대한민국! 이재명은 합니다!’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별 의미 없는 말이고 방점은 이재명에 있다. 여기에 출마선언의 모든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마선언은 불공정, 양극화, 기본소득 그 밖의 여러 분야 정책방향을 담고 있지만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 부분이다. “전문가 몇 명이면 그럴 듯한 공약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정책에는 저작권이 없습니다. 수많은 가장 효율적인 정책을 선택하는 것은 용기와 결단의 문제이고, 강력한 추진력이 있어야 개혁정책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로 90%가 넘는 공약이행률을 기록했듯이 강력한 추진력을 입증한 자신은 저항을 뚫고 개혁을 성취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민주당도 지우고, 문재인도 지우고 오로지 자신의 브랜드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선거 전략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다. 역대 민주당 정권을 계승한다는 표현을 했지만 수사일 뿐이다. 같은 정당 소속의 인기 없는 전임 대통령 뒤를 잇는 후보자가 취하는 영리한 전략이다. 김대중 정부를 잇는 노무현 후보가 그랬고, 이명박 정부를 잇는 박근혜 후보가 그랬다.
공정한 경쟁 vs. 억강부약
윤석열은 출마선언문에서 이렇다 할 경제 사회 정책을 내놓지 않았지만 공정과 법치에 대한 강조에서 그의 경제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한편 ‘경제적 기초와 교육의 기회’, ‘승자독식’ 반대, ‘연대와 책임’ 등을 언급했지만 그가 상정하는 국가의 역할은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법치를 확립하는 것으로 국한된다. 그는 기술 혁명 시대의 도전을 극복하기 위한 과학기술과 경제사회제도의 혁신도 공정한 기회의 보상과 예측 가능한 법치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말뿐이었을망정 박근혜도 수용했던 복지국가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서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밀턴 프리드만의 <선택할 자유>를 꼽았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재명이 제시한 정책들은 하나같이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필요로 한다. 경제적 기본권 보장, 복지확충, 기본소득, 사회안전망 강화, 인적 자원 육성, 사회적 대타협 등 평소 이재명이 관심을 가졌던, 또 가질 법한 정책들이다. 그는 심지어 개발시대를 연상시키는 산업경제구조 재편까지 들고 나온다. 초고속통신망과 벤처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IT강국을 선도한 김대중의 선례가 있지만 산업구조의 재편을 시장 대신 국가가 선도하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이재명도 윤석열 못지않게 공정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재명의 공정과 윤석열의 공정은 말만 같을 뿐 차이가 있다. 윤석열의 공정은 법치를 통해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게 하는 심판의 역할이라면 이재명이 지향하는 공정은 “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억강부약의 정치로 모두 함께 잘사는 대동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의 부당이익은 누군가의 손실입니다.”라거나 “투기이익 같은 불공정한 소득”이라는 표현도 동원된다. 굳이 공정이라는 말을 동원할 것도 없이 명백한 범죄행위는 법의 심판을 받으면 된다. 부약, 즉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할 일이다. 하지만 국가가 무슨 수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킬 것이며, 투자와 투기를 구분할 것인가. 인간의 탐욕은 억제할 것이 아니라 왕성한 경제활동과 번영의 원천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좋은 정치다.
문명국가의 보편적 가치 vs. 국익중심 균형외교
윤석열의 출마선언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 가운데 하나가 외교정책의 방향에 관한 부분이다. 윤석열은 “국제사회는 인권과 법치,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 사이에서만 핵심 첨단기술과 산업시설을 공유하는 체제로 급변”하고 있는 바, “대한민국이 문명국가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는 분명한 입장을 보여야”한다고 외교안보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에 반해 이재명은 “국익중심의 균형외교를 통해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의 새길”을 열겠다고 한다. 윤석열의 인식이 변화하는 국제정치질서를 더 잘 반영하고 있다. 미중간에 테크 냉전과 플랫폼 경쟁이 벌어지고, G7과 쿼드(Quad) 등을 통해 대중 안보협력이 강화되고 있는 현 상황은 한국에게 동맹을 통하지 않는 균형외교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다. G7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의 일대일로에 우호적이었던 이탈리아는 미-이탈리아 동맹은 가치동맹으로서 중-이탈리아 동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이재명의 균형외교 노선은 현실과 동떨어지고 한미관계를 약화시키고 한일관계를 파탄 낸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을 답습하는 것이다.
출마선언에 빠진 ‘기후 위기’
대한민국 미래 비전 제시는 ‘부족’
윤설열과 이재명의 출마선언이 함께 놓치고 있는 것은 기후위기이다. 윤석열은 일절 언급이 없고, 이재명은 에너지전환을 말할 뿐 기후위기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기후위기처럼 대한민국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가 있는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두 유력 후보가, 출마선언 구석구석에서 ‘미래’라는 단어를 반복했지만 막상 기후위기를 쏙 빼놨다는 것은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그들의 다른 말까지 공허하게 느껴진다.
대부분 사람들은 출마선언문에서 세부적인 정책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큰 방향과 목표를 보여주기 원한다. 대통령의 아젠다는 대통령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다. 큰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이끄는 것이다. 박정희는 ‘잘 살아보세’라는 방향을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국민들의 열정을 끌어내어 산업화를 이룩했다. 산업화가 박정희만의 공은 아니지만 박정희의 리더십을 부정할 수 없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과 리더십은 민주주의의 토대위에서 대한민국이 IT강국과 문화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심리학자인 허태균 고려대 교수는 한국사회를 사춘기에 비유했다. 사춘기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다가 자아가 형성되고 스스로 선택하는 시기다. 지난 70년간 한국사회는 서구의 산업, 민주주의, 학문, 문화 등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고, 컨텐츠 강국이 되었다. 그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가? 한국사회가 지금까지는 따라가기만 하면 됐는데 이제는 스스로 방향을 결정해야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여기서 여러 가지 갈등과 혼란이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대통령 혼자 할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선에 나선다면 사춘기와 같은 대한민국이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에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지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름은 무엇이어도 좋다. 포용국가든, 복지국가든, 고 박세일의 선진화든, 또는 매력국가든 이런 수준의 비전이 필요하다. 윤석열은 아예 없고, 이재명의 ‘새로운 대한민국’이나 ‘모두 함께 잘사는 대동세상’은 전혀 새롭지 않다. 우리나라가 아직은 이런 수준의 대통령 밖에 가질 수 없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