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사유(思惟)의 항해를 시작하다 - 화가 김식 (하)

2022-02-20     심정택 칼럼니스트

들뢰즈는 새로운 개념들을 '새로운 사유의 인지'라고 했다. '사유'는 충격이 오고, 사건이 만들어지고, 무언가 생성이 되는걸 말한다. '변화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거기에 대해 생각해 내는 창조적 과정이 사유'이다. 

사유는 사건의 조건과 환경을 따져서 해야 한다. 푸코가 말한 '바깥으로의 사유'이다. 들뢰즈는 바깥으로 나가 사유의 전제조건을 봤다. 들뢰즈는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사유하는 나), 또는 확실성의 확보를 모두 제거하고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무재2 120×120 2019 / 사진 = 김식 제공

라틴어 ‘고키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이다. 코기토는 라틴어로 '나는 사유한다’를 의미하지만 데카르트 이후 ‘사유하는 나’, 인식주관이나 인격주체를 의미하는 명사로 사용된다.

코기토를 원리로 하는 과정에서 배제된 타자에 대해서 코기토를 원칙으로서 전개된 실천이 어떠한 효과를 미치는가의 문제가 있다. 푸코는 ‘회의’(懷疑)는 미리 코기토에서 광기가 배제 되어 있기에 코기토에서 파생한 실천은 광인(狂人)을 감금하게 된다고 논하였다. 자크 데리다는 회의는, 광기의 가능성을 내포함으로써 코기토에 있어서 정기와 광기의 분할이 애매하다고 하였다. 

김식은 노자(老子)와 장자에도 심취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자 사상의 핵심적 기초를 <노자> 25장 ‘道法自然(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른다)’로 본다. 장자는 인간의 자아중심의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세계의 실상을 파악하고 정신의 자유를 얻는 경지를 추구했다. 장자가 추구한 세계는 도가 공통의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라는 기초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20여 년전 국내 동양학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론에 대해 <노자> 해석이 유행했었다. “노장老莊 사상의 사유문법은 데리다가 말한 문자학(文字學· grammatologie)의 문법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라마톨로지

데리다는 언어의 기호체계(記號體系)가 자의적인 것이라는 인식에서 언어 위에 조립된 논리학을 재검토하였다. 소크라테스 이후 모든 서양의 철학적 전통을 형이상학이라고 규정하고 새로운 해석을 위해 해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라마톨로지>(文字學· le grammatologie)는 데리다의 대표 저작으로 손꼽힌다. 이 책에는 데리다 사상의 핵심인 ‘문자언어’ ‘차연(差延)’ ‘대리보충’ ‘탈구축’ 등이 제시되었다. 

서양 형이상학을 관통하는 것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간 이분법의 위계다. 음성언어를 이성·합리성과 결부되고 개인 의식 속 내면적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 문자언어를 이차적 외연, 목소리의 대리 보충물, 이성에 본질적이지 않은 보조적 테크놀로지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서구 형이상학은 글보다 말이 로고스에 더 가깝고, 더 가치 있다고 본다. 

데리다가 겨냥한 것은 로고스 중심주의에 내재된 질서다. 이분법의 위계질서가 그동안 부당하게 이뤄진 억압들을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작동해왔다는 게 그의 통찰이다.

탈구축은 이러한 폭력적 위계를 해체하는 것을 말한다. 탈구축은 내부에서 그 위계질서를 전도시키고 열등한 것들을 옹호하는 것을 함의한다. 데리다에게 그라마톨로지, 즉 문자학은 서양 형이상학 전통을 탈구축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언어안의 자연 90×117 2018 / 사진 = 김식 제공

중국 선종(禪宗)의 창시자 달마(達摩) 선사는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면벽수행을 하면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한다. 선은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해지는 세계임을 보여준다.

김식은 언어의 체계를 이해하면서 언어에 덧씌워지지 않은 실체, 대상을 표현하려했다. 김식은 회화가 언어의 강, 언어의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언어의 포구에 머물러 있음을 보았다. 자연도 언어 안에서 규정되었고, 집단 생활을 하는 인간은 자연을 인지하고 배우기 전에 언어부터 배운다. 예술의 파토스(pathos)는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대신 ‘현존재’를 내세웠다. 특히 언어는 인간의 현존재를 대표하며, 존재 이해의 원천이 된다고 했다.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지므로, 유일하고 변하지 않으며 모든 시대와 문화에 통용되는 존재는 없다. 단지 인간은 자신의 시간 속에서, 존재의 부름에 나름의 방법으로 대답하는 것일 뿐이다.

우듬지의 고용한 울림 16. 90×180 2021 / 사진 =김식 제공 

언어로 표현된 것이 실재(reality) 그대로가 아니다. 즉, 언어는 실재의 세계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동원된 방편이다. 

김식은 미술에 덧씌워진 언어를 색으로 보았다. 색을 빼고 나서야 단순한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작품은 음영이 없다. 구체적인 형상이 없고, 실루엣만 있다. 노을이 지면서 만들어내는 숲의 형상, 바람, 빛의 변화가 없다. 언어를 상징하는 서체 오브제를 만들어 캔버스에 붙이고 위에 색을 뺀 채색을 하여 화폭 뒤로 밀어냈다. 종이(하드보드)를 오려서 서체를 만든다. 
그의 작품은 ‘경계’(境界)를 드러낸다. 상(像)에서 경(景)으로 넘어가는 지점이 경계(境界)이다. 밤과 낮 사이, 동틀 무렵, 언어 이전과 이후, ‘道法自然’의 자연이 아닌 의식이 확장되어 ‘인간과 자연의 경계’ 문제로 넘어간 것이다. 김식은 인간과 자연을 어떻게 구획 지을 것이냐를 고민해 왔다. ‘인간과 자연’, ‘나와 타자’와 같은 문제들이다. 그가 드러낸 것은 결국 실루엣(그림자)이다. 

미셀 푸코가 말하는 판옵티콘(panopticon)은 중앙 감시탑에 모든 수감자의 실루엣이 다 비쳐서 확인되지만, 중앙의 탑에는 누가 있는지 수감자 방에서는 알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비유이며 규율권력(체계) 안에 갇혀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주체인 듯 하지만 ‘미시 권력’에 갖혀 대상이 되었기에 실루엣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인다. 실루엣은 또한 자연을 보는 신의 계산과 ‘말’을 제거한 작가의 계산이 중첩되어 있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가 다루고 표현하는 ‘미학적 경계’(境界)에는 심미가 따른다. 그 심미는 아직 의미(언어)를 부여받지 못한 세계, 이미지와 의미의 안정된 연결이 이루어지지 않은 애매모호한 세계를 들여다 본다. 

그의 작품이 ‘풍경의 대상으로서 자연’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것은 그 자연에서 모티프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김식이 자연에 천착하게 된 역설은, 예술적 지향점과 향학열이 광기어린 집단의 히스테리로 인한 따돌림을 당한 젊은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
 
의재 허백련(1891 ~1977)도 일본에서 공부해 관념적 산수, 남종화를 완성시키지 않았나. 김흥수(1919 ~ 2014) 또한 하모니즘이라는 독창적 세계를 열지 않았나. 도쿄예대 선후배인 김흥수와 히라야마는 20여년전 서울에서 2인전을 열기도 했다.

한국 화단에서 ‘동양화 작가'라는 정체성이 ’서양화 작가'이라는 타자와의 대비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명백하게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내가 이렇게 하면 저들은 나를 이렇게 생각하겠지"라며 말을 닫아 버렸다. 작가로서의 정체성, 자신이 속한 장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졌으나 그를 둘러싼 삶의 경계를 넘지 못했다.  

김식은 말한다. “ ‘한국화’는 올바른 말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칭할 수는 없다”. “일본화, 중국화라는 건 우리가 지칭할 수 있고,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우듬지의 고요한 울림14. 84×60 2018 / 사진 = 김식 제공 

조선에서 이어져 온 전통적 묵화를 겸재 정선을 앞세워서 ‘진경 산수’에서 ‘실경 산수’ 쪽으로 끌고 간다. 김식은 진경산수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라고 본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한국화’라고 지칭할 수 있는 미술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흔히들 말한다. ‘현대 미술에 있어 서양화 물감(오일, 아크릴), 동양화 물감(수간, 진채, 분채), 캔버스(광목, 장지:한지)등 특정 재료와 매체를 논하는건 의미가 없다’, ‘재료와 매체는 작업 기법의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우리 합리화일 수도 있다. 여전히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그는 교육 현실을 개탄한다. ‘현재 대학은 먹 그림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도 없다. 학생들은 붓을 제대로 세우지도 못한다’   

생산과 소비 이외 활동인 예술을 잉여의 필수불가결한 소모로 설명한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 ~1962)는 <저주의 몫>, ‘예술이 무엇인가’에서  '그 사회가 버리려고 하는 것에 그 사회의 정체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식은 작가로서, 한국 사회가 버리려고 하는 중국인과 한국인이 ‘한국화’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건지기 위해 극한의 최선을 다해 왔다. 

고구려 수산리 고부벽화 모사 200×310 2016 / 사진=김식 제공

수천년 전 순례자들이 남긴 흔적을 좇아 간 사막에서 얻은 영성은 평생을 쫓아 다녔다. 히라야마는 김식을 ‘차라리 어떤 풍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곳’(소설가 김연수) 사막으로 인도하였고, 고구려 수분리 벽화 사진을 남겼다. 김식은 2년여 공들여 벽화를 재현했으나 스승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보여주지 못해 많이 아쉽다고 한다.   
반딧불이가 있던 17년전 마련한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작업실은 고요하다. 창을 통해 보이는 사계(四季)의 변화만이 있다. 수레실길 초입에서 길을 따라 20여분 걸으면 도로가 끊긴 곳이다.   

비발디의 '사계'는 봄에 피어나는 신록과 새들의 노래, 여름의 무더위와 그것을 식혀주는 소나기, 가을의 풍성한 들판, 겨울의 매서운 눈보라와 집 안 난롯가에 모여 앉은 농부들의 모습 등이 풍경처럼 지나간다.

‘사계’는 자연만이 있는 게 아니다. 노동하는 인간의 고단함도 묻어난다. 민중 노래패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도시 노동자의 고단함을 노래 ‘사계’에 담고 있다. 

언어를 밀어내는 과정에서의 ‘색의 배제’는 그가 작업 과정에서 소리(음악)을 배제한 것과도 일맥 상통한다. 그의 작품은 무음(茂蔭)의 세계가 아니라 창으로 보여지는 갈대의 움직임과 같은 것이다. 

김식은 스스로 만든 물감을 사용한다. 미디어아트와 구분되는 전통적 회화는 공간에서의 반사광으로 작품성을 드러낸다. 광선과 반응하는 광택을 없애기 위해 백토로 밑 작업을 한다. 원칙적으로 색을 뺐으나 청색과 붉은색으로 구분한 것은 최소한의 미술적 장치이다. 색이 없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장르, 형태, 크기와 상관없이 미니멀리즘은 작가의 메시지 마저도 지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의 작품은 선거철 또는 집권자들이 위기에 몰릴 때 동원하는 정치적인 반일, 반중, 반미, 또는 그 반대의 집단적 메카시즘적 광기에 대항하기 위한 ‘카무플라주(camouflage, 은폐·위장)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의 작품은 동시대의 정치적 사건을 담은 소리 없는 역사화이기도 하다.   

그는 담담히 그림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의 그림에는 자연으로부터 추방되고 문명이라는 공간에 유폐된 현대인의 초상과 아우성이 있다. 그의 삶이 그림의 일부가 된 듯 배여있다. 

참고 1.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화가의 시선과 몸 / 진보성 
     2. 근대 이성의 본질을 폭로하다 – 광기, 권력, 폭력 / 진보성 
     3. 들뢰즈의 반복과 영원회귀 / 진보성 
     4.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박영욱
     5. 서양철학의 주춧돌 ‘이분법적 사고’ 해체 / 김호기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