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의 겨울 나그네, 칸트

2022-02-12     하광용 에세이스트
한껏 멋을 낸 겨울 양재천의 칸트 (1724~1804), 2022. 1. 24  / 사진=하광용 

양재천의 현자 칸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따스한 인정에 감동을 받고 있을 듯합니다. 위 사진 속 그의 모습,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겨울 남자가 된 최근 그의 모습입니다. 한 달 전쯤 그를 지나칠 때도 머플러를 두른 그의 모습을 보고 흐뭇해했는데 거기에 한 술 더 뜬, 아니 이렇게 한 겹 더해진 그의 모습을 보고 깜놀하여 이렇게 글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지난 12월 겨울이 되면서 추위에 노출된 그가 안쓰러워 마음씨 착한 이 동네 어떤 분께서 머플러를 둘러주었을 텐데 그것도 모자라 또 그 분인지, 아님 다른 분께서 어깨와 몸을 감싸는 망토까지 그에게 입힌 것입니다.

그 선자가 누구이든 그는 칸트의 팬일 것입니다. 망토는 1월 중순 매서운 한파가 왔을 때 입힌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 두꺼운 옷이나 입힌 것이 아니라 코디까지 세세히 신경을 썼습니다. 빨간 목도리에 어울리는 감색 망토를 준비해 패션에 무관심해 보이는 그 독일 남자를 멋진 겨울 신사로 만들었으니까요. 이렇게 머플러든 망토든 그를 변화시킨 사람은 100프로 남자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멋진 옷매무시 솜씨도 그렇지만 그럴 리도 없고 그럴 수도 없겠지요. 제 기준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대단한 우리동네 인심입니다.

망토를 두르기 전 칸트의 모습, 2021. 12. 20 / 사진=하광용

그가 살았던 왕의 언덕이라 불린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도 칸트는 이런 인정을 맛보았을까요? 태어나서 살며 그곳에서 100마일 밖을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그였습니다. 거기에 살 때 칸트는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일화처럼 그곳에서 매일 오후 5시 강변을 산책해 그곳 주민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배달해주곤 했었지요. 그리고 그의 천재성에 비해 뒤늦게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늦깎이 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 도시를 철학적으로 번성하게 하였습니다.

사실 칸트가 그렇게 늦어진 것은 철학, 천문학, 수학, 물리학, 화학, 지리학, 정치학 등 전 학문에 능통한 천재였기에 젊은 시절부터 일찍이 학교 측에서 다른 학문의 정교수를 제안했으나 꼭 철학 교수만을 하겠다는 그의 거부로 늦어진 것입니다. 기존 철학 교수 중 누군가 죽어줘야 자리가 났던 시대라서 그랬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강사로 계속 재직하다 46세가 돼서야 정교수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도시의 대학으로 갔더라면 당연히 일찍부터 철학 교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처럼 근세 이후 독일엔 위대한 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니체, 쇼펜하우어, 헤겔, 마르크스, 하이데거, 피히테 등 이렇게 날고 기는 철학자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누가 뭐래도 그중에 제일은 칸트일 것입니다. 근대 이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 흘러들어갔고, 근대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고 할 정도니까요.

이런 칸트라는 대철학자로 인해 우리는 그가 빛낸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독일 통일 이전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쾨니히스베르크라는 그 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칸트 사후 1세기가 지나 그의 후손들이 벌인 1,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면서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입니다. 철저하게 독일풍이었던 도시의 이름은 흠뻑 러시아 냄새가 나는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었습니다. 칼리닌은 볼셰비키 원로의 이름입니다.

이후 쾨니히스베르크는 더 이상 칸트스럽지도 독일스럽지도 않은 도시의 정경으로 바뀌었습니다. 전후 쾨니히스베르크를 접수한 소련이 그 도시를 해체했기 때문입니다. 군주국이었던 프로이센과 쾨니히스베르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과거 아름답고 낭만적인 중세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의 유서 깊은 건축물들은 다 파괴되고 전형적인 사회주의 국가의 밋밋한 일자 도시 모습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진에서 보듯 같은 곳 전혀 다른 과거와 현재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어이없고 대담한 문화파괴주의적 작태라 할 것입니다. 당시 전쟁으로 파괴된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인 레닌그라드의 부서진 건축물을 복구하는데 쾨니히스베르크의 자재가 쓰였다고 합니다.

사라진 도시, 20세기 초 쾨니히스베르크 전경
같은 장소 다른 모습, 칼리닌그라드로 변한 옛 쾨니히스베르크.

그리고 칼리닌그라드의 많은 독일인들은 독일로 추방 성 귀환을 당하였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독일이 아니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옛 도심에 남아있는 쾨니히스베르크의 흔적은 대성당이 거의 유일하다고 합니다. 사진 속 성당 주변 둑방 길이 칸트가 산책한 길입니다. 옛 모습과 비교하면 산책의 대마왕인 천하의 칸트라 하더라도 별로 산책하고 싶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칸트의 무덤은 독일로 옮겨지지 않고 여전히 칼리닌그라드에 있습니다.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제 독일 철학자 칸트를 만나려면 독일이 아니라 러시아로 가야 합니다. 살아생전 도시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그인지라 죽어서도 그곳을 지키고 있나 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칸트라는 유명세와 의미로 볼 때 독일이 유해 송환을 추진할 법도 한데 그런 시도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칸트의 유해가 안치된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칸트의 모교이자 평생직장인 쾨니히스부르크 대학도 도시의 운명에 따라 칼리닌그라드 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이후 그의 이름인 임마누엘 칸트 대학으로 다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아무리 러시아라곤 하지만 학교 마케팅을 위해서라도 듣보잡 칼리닌보다는 칸트가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요. 어차피 쾨니히스베르크란 옛 이름으로는 돌아갈 수도 없으니까요. 이렇듯 살아서나 죽어서나 고향에서 요지부동한 칸트가 우리나라 우리동네 양재천에 와있는 것입니다. "Good job, Mr. Kant".

그런데 칸트도 이제는 이곳 양재천에 온 것을 매우 다행스럽고 좋다 할 것입니다. 4년 전 2018년 이역만리인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낯설고 외로웠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쾨니히스베르크의 강변처럼 예쁜 양재천의 사시사철이 익숙해지고 그를 반기는 이곳 사람들의 진심도 알게 되었을 테니까요. 양재천 산책을 하는 사람들 중 그의 옆에 가서 앉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그를 쓰다듬기도 하고 잠깐 그처럼 사색도 하다 가니까요.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저처럼 사진을 찍고 그 모습을 이렇게 사방에 알리니 그 인기가 아이돌 스타 부럽지 않습니다.

급기야 추운 겨울 이렇게 머플러와 망토로까지 따스한 애정을 표해주니 칸트의 행복감은 꼭지까지 올라가 있을 것입니다. 무뚝뚝한 그의 고향 독일인과는 다른 우리네 살가움을 그도 이젠 알겠지요. 처음 왔을 때 혹시 느꼈을지도 모를 나그네 설움은 어느 순간 온데간데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의 고향에선 맨날 이런 비판, 저런 비판만 날카롭게 외쳐댔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이제 그의 고향은 나라도, 주소도, 모습도 바뀌어 그가 가고파도 찾아가기 힘든 곳이 되었습니다. 말도 바뀌어 통하지 않고요. 그리고 평생 미혼남에 무자식으로 산 그인지라 설사 간다 해도 그를 반기는 후손도 고향엔 없습니다. 그러니.. "Mr. Kant, be here long".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최근 ‘지명에서 이순으로의 기행’이라는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