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영화 볼 수 있는 '영화미디어 아트센터' 를 기다리며
동대문구 답십리 '영화미디어 아트센터' 상반기 개관 예정
종종 서울 각 구청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답사지를 물색하는데, 이번에 찾은 곳이 답십리 동대문구문화회관 영화전시관이다. 전철을 갈아타고 돌아 돌아 장한평에 내려 초록색 버스를 탔는데, 초행이어서 가까운 곳에 내린다는 게 그만 지나쳤다. 두 정거장을 지나고서야 내려 걸어서 찾아가니 거리가 꽤 된다. 그날 종일 1만4천보를 걸었다.
사전에 답십리 영화촬영소를 검색하여 읽어보니 ‘외관상’ 흔적은 ‘촬영소 사거리’란 거리표지와, 촬영소 터에 세워진 ‘동답초등학교’ 건물에 영화 상징 모형을 붙여 놓은 것 밖에 없단다.
먼저 마주한 촬영소 사거리 표지판을 동서 양쪽에서 찍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입구에서, 건물 5층에 설치한 카메라, 촬영기사, 필름을 형상화한 조각과 ‘영화를 꿈꾸는 아이들의’ 서울동답초등학교 글씨가 나오도록 사진에 담았다. 영화관련 또 다른 무엇이 있나 해서 학교 주변을 돌면서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것을 찾진 못했다.
영화전시관이 있다는 동대문구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옆 건물인 체육관 모퉁이 대로변에 ‘답십리 영화촬영소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홍상수 감독의 부친인 홍의선 선생이 영화산업을 육성하고자 초등학교 자리에 스튜디오 2개, 연기실, 부대시설이 들어선 건물을 지어 한국영화 산실이 되었다"는 내용이 각자돼 있다. 내력설명 옆쪽에는 최무룡 감독의 1966년 작 <나운규 일생> 포스터가 들어가 있고, 뒷면에는 촬영소 터와 주변 위치를 표시해 놓았다.
동대문구문화회관 안에 있다는 ‘영화전시관’으로 가니 그 건물은 ‘답십리 영화미디어아트센터’로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사장 밖에서 대화 중인 사람에게 "혹 다른 곳에서 전시물을 볼 수 있느냐"고 물으니, 전시관 활동을 중단하고 있단다. '그러면 그렇게 표시해 놨어야지'하는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돌아와서 동대문구문화회관을 검색하니 ‘2020년 9월1일부터 운영을 중단한다’는 알림이 표기돼 있었다.
문화회관 홈페이지에는 홍의선 선생이 1964년 대한연합영화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그곳에 촬영소를 설치하여 “김진규, 김보애 주연의 <부부전쟁>(‘64년)을 시작으로 <이수일과 심순애>(‘65년), <나운규 일생>(‘66년), <민검사와 여선생>(‘66년), <청사초롱>(‘67년) 등 8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1969년 이만희 감독의 <생명>을 마지막으로 답십리 촬영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곳에는 영화상영관과 자료전시관이 있었다고 한다. 자료전시관 출입구에는 ‘유명영화인 사진’을 연출․전시해 놓았고, 영화소품관에는 영화장비(촬영, 조명 등), 영화제 트로피 등을, 홍보관에는 답십리촬영소 전경사진, 영화포스터, 대본 등을, 영화인 애장품 코너엔 유명 영화인 애장품 등을 전시해 놓았단다.
주변을 살펴보고 난 후 촬영소를 설립한 홍의선 선생이 염문설로 세간의 화제가 된 홍상수 감독의 부친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더욱 내 관심을 끈 것은 홍 감독의 어머니가 1980년대 ‘시네텔 서울’이란 TV프로그램 외주제작사 대표였던 ‘전옥숙’씨라는 점이다. 나는 1980년대 중반 방송영화를 관장하던 문화공보부의 장관비서관으로 근무해 그분의 장관면담 일정을 주선한 적도 있고, 어느 동료는 퇴직 후 그 회사에서 잠시 일한 적도 있다.
전 대표는 ‘대중문화계의 여걸’로 통할만큼 적극적인 성품의 소유자다. 남편은 군인출신이어서 실제 영화나 사업 분야는 전 대표가 주도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자신이 아닌 남편의 공덕으로 기록돼 있다. 기념비가 설치된 것은 생존 당시였으므로, 여걸답게 남편 몫으로 넘긴 것이 아닐까?
나도 1980년대 중반 이슬람국가에서 수년간 ‘문화홍보관’으로 근무하면서, ‘Honeywell’이라는16㎜영사기를 이용, 한국영화 여러 편을 주재국 인사들에게 보여주었다. 외부에서 상영하기도 했으나 이슬람국가여서, 혹여 외설 기준에 저촉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애로물’은 주로 집에서 손님을 초대하여 틀어주었다.
필름이 손상되었으면 일부를 잘라내고 붙이는 작업도 능숙하게 했다. 1초에 24장면이 들어가므로, 잘라내도 관람객들은 모르고 그냥 지나친다. 이후 VHS, 베타 비디오테이프 혼용의 혼란기인 1990년대 초까지 해외에서 열심히 영화를 틀어줬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개별상영회보다는 영화제 개최를 연결해주거나, 소개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 직접 필름을 틀어주는 일에서 멀어졌다.
1974년에 발족한 재단법인 한국필름보관소가 2002년 영화진흥법에 의한 특수법인 ‘한국영상자료원’으로 발전적으로 전환하였다. 그런 국가기관이 있음에도 지방자치단체에서 별도의 영화미디어아트센터를 운영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열정 없이는 운영이 쉽지 않을 것이다. 리모델링으로 운영을 중단하기 전에는 왕년의 영화감독 한분이 영화전시관에 상주하면서 관람객들을 응대하였다고 하니, 그런 분들의 열정을 잘 조직화한다면 난제를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관람 문화도 점차 인터넷을 통한 시청으로 바뀌고 있어 ‘일반 주민’을 상대로 한 시설 운영은 더 어려워졌다. 따라서 주민 친화적인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콘텐츠를 확충하는 노력도 병행하여야 한다. 3월에 공사가 끝나고 다시 시민들이 다가갈 날이 자못 기대된다.
이번 출타에도 일제 잔재를 목도했다. ‘왜 지하철역은 장한평인데, '동' 이름은 장안동인가?’ 늘 궁금했다. 검색해보니 원래 ‘중랑천 즉 한천(漢川)을 끼고 발달한 평야라는 뜻인 장한벌, 장한평’이었는데, 일제가 한자로 장안평(長安坪)으로 사용하여 그렇게 되었단다. 이런 것은 ‘죽창’으로 거덜 내고 통일해도 별 문제가 없는데 왜 그대로 뒀는지 의문이다. ‘목마장(牧馬場) 안에 있던 벌’이어서 장안벌, 장안평이라는 지명 유래가 맞다는 것인가? 좌우간 통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