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왜군의 휴전회담 터 '심원정'에 서서

2022-01-22     황현탁 여행작가
서울 용산구 용산문화원 뒤편에 있는 심원정.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의 휴전 교섭 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사진=황현탁)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87-2 용산문화원 뒤편 언덕에는 심원정(心遠亭)이란 정자가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지원군인 명나라의 교섭책인 심유경(沈惟敬)과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강화교섭을 하였던 장소로, 인근 언덕에는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心遠亭 倭明講和之處碑)’란 글자가 음각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수령이 각각 680년, 355년, 220년 된 느티나무(3그루)가 옆을 지키고 있다. 수령 680년 된 나무는 당시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심원정 터에 있는 왜명강화지처비(心遠亭 倭明講和之處碑). 명나라 교섭대표 심유경과 왜군 장수 고니시가 '강화 회담'을 한 곳이다는 설명이 있다. (사진=황현탁)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心遠亭 倭明講和之處碑)’라고 새겨진 기념비. (사진=황현탁)

명과 왜의 강화교섭 자초지종을 알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당시의 명나라의 지원교섭과 파병, 왜군과의 전투 등의 과정을 알 필요가 있는데,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해당부분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선조실록(宣祖實錄)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해인 1592년 3월 3일 자에는, 그날 김성일(金誠一)이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평소 “왜는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못된다.”(倭必不來, 寇亦不足憂)고 말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4월 14일 자를 보면, 4월 13일 왜군 20만 명이 부산진으로 침략하여 14일 부산진, 동래부를 함락시키고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5월 1일 자에는 비변사 이항복(李恒福, 훗날 병조판서)이 중국 촉한(蜀漢) 황제 유비(劉備)가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하여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승리한 사례를 들어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자고 건의하며, 6월 1일 자에는 5월 10일 요동도사 임세록(林世祿)이 왜적의 실정을 탐지하러 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같은 날짜에 평양에 입성한 왜장이 대사헌 이덕형(李德馨)을 면담하면서 ‘명나라 조공(朝貢)길을 내주면 무사할 것’이라고 한다. 이후 이덕형이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가 교섭하여, 군사 천명이 조선으로 파병된다. 지원병이 중과부적이라 다시 주청사(奏請使) 정곤수(鄭崐壽)를 보내 많은 병사(大兵)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한다.

9월 1일 자에는 중국이 상황파악을 위해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던 심유경이 조선으로 돌아왔음을 기술하고 있으며, 그가 조선(순안)으로 와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조선이 일본에 무엇을 잘못했기에 일본이 어찌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는가?”(朝鮮有何虧負於日本, 日本如何擅興師旅?)라고 전갈을 보낸다. 이를 접한 고니시는 직접 만나자고 하여, 둘이 만나 평양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휴전에 합의하고 50일간의 말미를 준다.

역시 9월 1일자에는 중국황제가 특사 설번(薛藩)을 보내 파병사실을 통지하면서 조선왕실과 백성을 위로한다. 설번은 '조선은 중국의 울타리(藩籬)와 같다'면서 하루빨리 대군을 파병할 것을 재차 건의한다. 11월 1일자에는 심유경이 다시 조선으로 와 왜장에게 '110만병을 동원하여 조선을 도울 것이니 돌아가라'고 회유한다. 

12월 1일자에는 명나라 군사 5만2,000명을 파견한다.(평양주둔 왜군은 1만 명) 1593년 1월 1일자에는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순안에 주둔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평양전에서는 승리하나, 안주․파주에서 패하여 개성에 주둔한다. 왜군이 조선남자들을 내통자로 여겨 몰살시키고, 산과 들을 불태워 명군이 말을 먹일 수 없게 된다. 그러자 이여송은 병을 핑계로 사직한다. 

이듬해인 1593년 2월1일자에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이여송에게 퇴군(退軍)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들어 만류하나, 그는 평양으로 돌아간다. 또 유성룡이 명군 왕필적(王必迪)에게 조선 관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명군이 지원하면 왜군을 소탕할 수 있다고 하자, 왕필적은 따르려 했으나 이여송이 따르지 않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4월 1일자에는 왜군에게 심유경을 보내 돌아가라고 타이르자, 용산에 주둔하던 고니시가 강화를 요구한다. 고니시와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를 만난 심유경은 “상국(上國)이 장차 40만 대군을 몰아 앞뒤에서 차단하여 너희들을 치려 한다. 너희가 지금 조선의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군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떠나간다면 봉사(封事)를 성립시킬 수 있고 두 나라가 무사할 것이니, 어찌 온편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자, 왜장들은 조공문제를 마무리한 뒤 물러가겠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이여송이 개성까지 왔으나, 진군하지는 않고 강화에 치중한다.  

중국사신으로 가장한 명나라 관원인 책사가 협상장으로 가 고니시와 심유경에게 “이여송 제독이 파주에 진주하여 유격장 척금(戚金)·전세정(錢世禎)으로 하여금 유성룡 등을 타이르게 하기를 ‘적을 속여 도성을 나가게 한 연후에 진격하여 섬멸하겠다.’고 하였다 한다.”고 전한다. 이에 왜군들은 군량미를 남겨두고 두 왕자와 관원, 심유경을 데리고 철군을 시작한다. 유성룡 등과 경성으로 들어 온 이여송 군은 적을 추격하는 척 하다가 되돌아오고 만다. 경성 유민들은 백에 한둘이었고, 산 사람도 귀신같았으며, 썩는 냄새가 진동하였고, 백골이 성 안팎에 쌓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 용산구 용산문화원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심원정 전경. (사진=황현탁)

실록의 기록에서도 협상이 용산(龍山)에서 행해졌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그곳이 심원정이다. 요즈음은 그곳이 한강에서 떨어져 있으나 500여 년 전에는 강변이었으리라. 그래서 조선말 40년간 벼슬을 하고 영의정까지 지낸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의 별장이 되었다고도 한다. 지리적 위치보다도 조선을 병탐했던 왜군이 조선의 대표가 아닌 지원군인 명나라의 대표와 협상하고, 지원군은 왜군을 조선에서 물리칠 생각보다는 ‘강화’에 치중하였던 안타까움을 선조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그러했지만, 지금도 한반도, 특히 한국은 비록 육지에 붙어 있으나 북한 때문에 섬나라와 같고, 한반도는 중, 소, 일과 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으로 인해 미군이 현재에도 주둔하고 있어 세계 4강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런 만큼 대한민국은 힘을 기르고 국익을 최대한 지킬 수 있는 외교 전략을 펼치는 것이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이다.

과연 지금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과 국민들의 생각이 그러한가는 정부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곰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