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위의 정부'' 중앙정보부(KCIA)의 흔적을 찾아

과거 중앙정보부, 민주인사 고문 등 인권침해와 정치공작의 산실

2022-01-08     황현탁 여행작가

정보기관의 기능과 소재, 그 구성원들의 신상에 관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그 활동 역시 비밀이 유지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2007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의해 납치된 한국 기독교목회자들의 석방을 위해 한국 정부가 직접 협상한 것은 적의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이라는 미 육군 전사연구소의 평가(2021년11월17일 발간 아프간전쟁공식기록서)와는 별개로, 당시 석방교섭 후 정보기관 수장이 공개석상에 등장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권위주의정부 시절 체제비판 세력에 대한 탄압 등 정치악용사례들이 민주화 과정에서 드러나고, 이로 인해 많은 직원들이 조직을 떠나거나 처벌을 받기도 했다. 특히 1992년 이전 처리한 사건 중 ‘사회적으로 의혹이 큰 사건, 시민·사회단체와 유가족 등이 지속적으로 의혹을 제기한 사건’을 재조사하는 ‘과거사건 진실규명위원회’가 설치되기도 했다. 정보기관에 의해 저질러졌던 ‘사유재산 탈취, 불법연행이나 강압수사․고문, 정치공작이나 정보조작 등 인권침해와 불법, 탈법행위들’이 공개되는 불행한 역사도 있다. 

우체통 모양의 기억6전시관과 소방재난본부. 기억6전시관은 지하에 취조실이 있던 '중정6국'으로 불렸으며 , 현재 소방재난본부 건물은 중앙정보부 사무동이었다. (사진=황현탁)

아픈 흔적들을 돌아보고

옛 정보기관의 터전이었던 예장동 여러 곳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국익보다는 정권수호를 위한 ‘과잉충성’ 징표들이 적나라하게 씌어있다.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서울유스호스텔(11월 현재 코로나19 생활격리센터로 사용 중)과 연결된 지상구조물이 없는 제6별관에는 지하벙커, 지하고문실이 있었고, 그곳에는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이 끌려와 취조’를 받던 곳이라고 씌어 있다. 중부경찰서 주자파출소가 있던 곳에는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로 끌려간 사람에 대한 소식을 접하려면 이곳에 접수하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흔히 면회소라고 불렸지만 면회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또 대공수사국이 있던 제5별관(현재 서울시 공원녹지사업소)에는 “간첩혐의 등을 수사하던 대공수사국이었으나 조작간첩도 만들어 낸 곳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지하 고문실이 있었던 중앙정보부 제6별관 안내판 

우체통 모양으로 된 기억6 전시관은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6국이 있던 자리로, 조선시대에는 군사들의 무예훈련장인 ‘예장터’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된 ‘한국통감관저터’였던 곳이다. 남산예장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상에는 전시관을 설치하고 지하에는 독립운동가였던 이회영기념관과 주차장을 만들었다. 또 지상 공원에는 옛 건물에서 나온 벽돌과 녹슨 철근, 기둥 잔해들을 비치해 고통스런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과거 중앙정보부 구내에 있던 일제 강점기 '한국통감관저터' .(사진=황현탁) 

전시장 안에는 “3층으로 된 6국의 2,3층에는 통상적인 조사, 지하층에는 고문을 포함한 강압취조가 진행되어 한자로는 ‘肉局’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가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적혀 있다. 물론 지하에는 ‘원자재 그대로 복원해 놓은 취조실’을 설치하여 안전 유리 너머로 볼 수 있다. 권위주의 시대에 ‘남산’하면 바로 ‘중정’을 의미하였는데, 그곳에 가야 비로소 ‘남산’의 흔적들을 살펴보는 길이 적힌 답사안내 팸플릿 <인권길>(Trail of Namsan Human Rights)을 비치해 놓아 지난날을 좀 더 소상히 알 수 있다.  

복원해놓은 과거 중앙정보부의 취조실.

앞쪽 스크린에서는 ‘각하를 삐뚤게만 바라보는 많은 손님들이 다녀갔다.’, ‘우린 이들에게 충성을 훈육했습니다.’, ‘교육이 너무 세서 더러 탈이 난 건 압니다. 다 국가를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몸으로 익힌 교육이야말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국민이 되어 나간 자들의 특성은 우리를 보면 바지에 선 채로 오줌을 눈다는 점입니다.’, ‘정치인, 학생, 노동자 따위들이 각하와 국가를 거스를 때 그걸 지지하고 막아낸 게 바로 이곳이고 우리였다.’는 등등의 ‘가혹한 억지 변명들’이 흘러나온다. 

'문학의 집 서울'로 바뀐 과거 중앙정보부장 관사.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사진=황현탁)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중앙정보부장 관사는 ‘문학의 집 서울’이 되어 있었고, 통감관저터는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기억의 터’로 조성되어 있다. 중앙정보부 본관으로 가는 길섶 남산 쪽 시멘트 축대에는 ‘세계인권선언’ 서문과 조문이 철판에 새겨져있다. 문학의 집 옆에는 11월 22일 한․러 양국 문학인들이 합심하여 세운 ‘톨스토이’ 두상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서울 예장동의 과거 중앙정보부가 있던 곳과 주변 지도.  

정보기관의 어제와 오늘

5.16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되는 국내외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부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감독'하는 중앙정보부를 설치한 것이 1961년 6월 10일이다. 그 법 제7조에서는 “중앙정보부의 직원은 그 업무수행에 있어서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전 국가기관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라고 규정하여, 설립될 때부터 소위 ‘정부 위의 정부기관’, ‘무소불위의 정부기관’이 될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1980년 12월 31일에는 국가안전기획부법을 제정하여 수행할 직무를 ①국외정보 및 국내보안정보(對共 및 對政府顚覆)의 수집ㆍ작성 및 배포, ②보안업무, ③형법․군형법 상 내란외환 관련 죄, 군사기밀보호법․국가보안법․반공법에 규정된 범죄수사, ④정보보안업무기획조정, ⑤직원범죄수사로 구체화하였다. 또 1994년 1월5일에는 직원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에 관여할 수 없다.’는 선언적인 ‘정치관여금지’조항을 개정하여, ‘정치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를 구체화, 세분화하여 규정하였다. 그리고 1999년 1월 21일에는 기관 명칭을 ‘국가정보원’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최고 국가 정보기관은 몇 차례 큰 변화를 겪었으며, 주된 청사도 중구 예장동에서 1995년 10월 서초구 내곡동(헌인릉 옆)으로 이전하였다. 또 정부가 바뀜에 따라 정보기관의 ‘원훈’도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1961 ~ 1998), “정보는 국력이다”(1999 ~ 2008),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2008 ~ 2016.6.), “소리 없는 헌신, 오직 대한민국 수호와 영광을 위하여”(2016. 6. ~ 2021. 6.),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2021. 6. ~ 현재)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다.

현재의 국가정보원은 권위주의 정부시절 가장 문제가 되었던 ‘국내정보, 특히 정치적 활동’과 관련되는 정보의 수집활동을 기능에서 삭제하였고, 임직원들은 엄격한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고 있어 과거와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현재 직무로 규정된 국익이나 안보침해에 대응하는 방첩활동, 대테러활동, 산업이나 국가보안, 사이버안보, 대북정보 등과 관련된 활동은 ‘대한민국’의 존립에 불가결한 것들로, 더더욱 정예화되어야 한다. 

정보기관과의 인연

내가 공직을 시작한 것은 1975년 5월부터로, 2008년 9월에 퇴직하여 33년 4개월을 재직하였다. 그 기간 동안 내가 수행했던 업무 중 많은 부분이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의 조정통제를 받거나 협조아래 추진했던 것들이다. 특히 통일부가 발족하기 이전에는 북한방송 청취, 대북 선전물제작과 같은 북한관련 업무도 직접 수행하여 수시로 협의하였다. 

정부 각 기관들은 국가정보목표우선순위(PNIO)에 따라 국가운영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 취득하여 정보기관에 제공하고 있는데, 내 업무 중 그런 것들이 비교적 많았다. 물론 국내에서 근무할 때에는 정보기관에서 요청하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였는데, 내가 취급했던 정보들이 당시는 물론 훗날 정보기관 기능조정의 빌미가 된 정치개입이나 인권탄압 등 문제소지가 있는 것들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15년 동안 해외근무 기간 중에는 주재국에서 수집, 취득한 북한 및 주재국인사들의 한반도 관련활동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취득·제공한 정보 중에는 소위 북한식 용어로 ‘블럭 불가담’, 우리 표현으로는 ‘비동맹’관련 주재국(대표단) 활동, 현지 인사들의 북한방문, 북한인들의 주재국내 활동 등을 들 수 있는데, 소속기관보다는 정보기관에서 필요하고 참고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옛날 그곳에는 친구도, 후배도 또 해외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근무했다. 시대의 잘못된 요구에 부응하여 죄의식 없이 몸바쳐 일했던 소수 때문에 일터 전체가 적폐의 온상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에게 헌신했던 많은 직원들, 드러내 놓을 수 없는 훌륭한 업적들을 가슴 속에 안고 이 세월을 넘기는 것이 공직의 길이란 긍지로 살아가길 염원한다. 우리의 아들딸은 지난 시절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고, 또 맹목적 충성을 요구받지 않는 자유 민주사회에서 살아가길 소망한다. ‘기림의 장소’로 탈바꿈한 정보기관 옛 터전을 보고 역사를 생각한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