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푸르름은 영원하지 않다'-광평로에서

2021-12-25     황현탁 여행작가

조선 태조 이성계는 향처(鄕妻)이자 정실인 신의왕후와의 사이에 여섯 아들을 두었으며, 경처(京妻)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다섯째 아들 방원(후에 태종)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계비태생의 작은 아들 방석(宜安大君)을 세자로 책봉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세자와 계비태생 큰 아들 방번, 책봉에 관여한 개국공신 정도전 등을 처단한다.

세종대왕이 즉위한 것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1392년부터 25년 후인 1418년이다. 왕권을 확립하기 위한 권력쟁투가 극심하던 시기였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자유분방한 생활 때문에 폐위되고,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즉위한 것이다. 두 형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여 분란은 피한다. 세종사후 양녕대군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세조를 지지하여 보호를 받는다. 

서울 수서역 인근 광평대군 묘역. (사진-황현탁) 

세종대왕은 부왕(父王) 태종에 의해 살해돼 후사가 없는 배 다른 삼촌 방번(撫安大君)과 방석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자신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과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을 출계시킨다. 금성대군은 단종복위를 꾀하다 사사되지만, 광평대군은 후사(後嗣)가 번창하여 이씨 왕족 중에서도 후손이 많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광평대군 내외 묘역. (사진-황현탁)

왕족들 간의 암투는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후에도 지속된다. 세조는 형인 문종 사후 왕위에 오른 조카 단종은 물론, 바로 밑의 동생(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 할아버지 태종에 의해 살해당한 세자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한 또 다른 동생(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까지 사약을 내려 살해하는 비극을 저지른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은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廣州郡 大旺面)이었으며, 그래서 그곳에 대왕중학교가 있다. 그곳 광수산(光秀山, 수서역인근)에는 결혼은 했으나 후사가 없었던 태조의 아들 무안대군의 묘, 봉사손으로 보낸 광평대군(廣平大君)의 묘,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永順君) 등 후손들의 묘 700여기가 안장돼 있다. 전주이씨 광평대군파에서는 무안대군, 광평대군, 영순군 세분의 제향을 모시고 있으며, 묘역입구에는 재실과 종회당, 종택이 있다.

광평대군 묘역 입구에 있는 종택. (사진=황현탁)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최근에 국가를 세운 군주라면 사람들이 선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모두 행할 수는 없으며, 종종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인정, 자비, 믿음에 반대되는 행동도 해야만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또 “군주는 자비롭고, 신의가 있고, 인정이 있으며, 신앙심이 깊고, 공정하게 보여야 하는데, 이러한 자질을 다 갖출 필요는 없다”고 했다.

한편 ‘부활한 마키아벨리’라고 불리는 로버트 그린은 《권력의 법칙》 23번째에서 “적은 완전히 박살내라”면서 잠재적 위협까지 제거할 것을 역설한다. 방원은 계비태생 이복형제 둘과 관련자들을, 수양대군은 조카와 형제들까지 살해하여 분란의 씨앗을 제거했다. 

태종과 세조는 왕이 되기 전, 또는 되고난 후에도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감행하였다. 마키아벨리와 로버트 그린은 말로써 ‘권력의 법칙’을 읊었다면, 그들보다 앞선 태종과 세조는 집권과 권력유지과정에서 권력의 속성을 이해하고 가차 없이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일원터널에서 수서역에 이르는 도로인 광평로 양 쪽 아파트단지는 담장을 허물고 화단을 조성해놓았고, 양쪽 인도 가로수 은행나무의 노란단풍이 오가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은행나무 열매는 떨어지기 전에 털어버렸는지 인도에는 은행은 보이지 않고 단풍잎만 떨어져 있다. 나그네 산책객인 내 입장에선 수북이 쌓이도록 놓아두었으면 좋겠지만, 초중고학생들의 등하교길이어서 환경미화원이 연신 쓸어 담고 있었다. 뛰고 밀치다보면 미끄러지기 일쑤 이니 안전을 위한 당연한 조처다.

보호수로 지정된 일원터널 위 수령300년 넘은 느티나무. (사진=황현탁) 

일부러 간 김에 일원터널 위에 있는 수령 300년이 넘는 느티나무(1981년 보호수로 지정할 당시 수령 270년이라고 하였음)도 구경하러 들렀는데, 낙엽은 지지 않았으나 단풍은 한물갔다. 아파트단지 쪽 화단은 각기 다른 나무나 꽃을 심어놓아 단풍은 즐길 수 없었다. 일부 화단에는 소나무를 타고 오르는 담쟁이가 빨갛게 단풍이 들었지만 낙엽은 지지 않고 대부분 푸른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광평대군의 증손이 건립하여 후손들이 살아온 전통가옥 필경재. (사진=황현탁)

궁마을은 개발제한 구역이어서 단독주택이 들어서 있고 주변엔 근린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건너편에는 광평대군의 증손 정안부정공 이천수(定安副正公 李千壽)가 건립하여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 온 전통가옥인 필경재(必敬齋)가 있는데, ‘반드시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고 살라’는 뜻이란다. 옆의 성당을 지나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을 따라 사잇길을 조금 들어가면 광평대군파 묘역이 나온다.

광평로를 다니는 사람들 중 지나간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세월의 아픔을 알 필요는 없지만, 글을 쓰고자 현장을 다니거나 검색하여 공부하고 있다. 반나절 시내투어프로그램에도 일원동코스가 있는데, 그 프로그램에 동행하면 역사공부를 할 수도 있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조선이란 나라를 세웠던 태조도, 집권하였던 3대 태종과 7대 세조도 생전에 가까운 가족과 신하들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다. 권력을 쟁취하고 찬탈한 이들의 ‘삶의 목표’는 원대했겠지만, 소소한 작은 행복인 ‘소확행’(小確幸)을 추구하는 일반 백성들이 과연 그들의 삶을 행복하였다고 생각했을까? 

오늘날은 민주사회가 된 만큼, 불의와 비상식과 비정상적인 집권은 언젠가는 그 실태가 밝혀질 것이다. 잠시 동안의 권력향유는 지나간 추억으로 치부될 것이며, 때론 치욕이 될 수도 있다. 민심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 민심의 왜곡이 문제지만, 그 역시 언젠가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광평로에도 내년 봄이면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는 물론, 앙상해질 은행나무에도 새싹이 움틀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자연의 순환을 의미하며, 길가를 나뒹구는 낙엽은 다른 생명체를 위한 거름이 된다. 자연의 이치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이 어떨까. 다시 봄이 돌아오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결정된다. 영원한 것이 아닌 5년 동안의 군주가 누구일지 궁금하다. 세종대왕처럼 훌륭한 족적을 남길 분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