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 9

요절한 천재들 '이탈리아의 벨리니 & 프랑스의 비제'(4)

불꽃놀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좋아하는 밤하늘의 쇼다.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볼거리일 것이다. 그래서 독립기념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일이면 국가적으로 화려한 불꽃놀이를 한다. 현대적 엔터테인먼트들의 집합체인 디즈니랜드 등 테마파크에선 매일 밤 화려한 불꽃놀이 쇼가 펼쳐진다. 가을밤을 수놓는 서울의 한강 불꽃쇼와 부산의 광안대교를 끼고 열리는 불꽃쇼에는 100만명 단위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즐긴다.

디즈니랜드의 불꽃놀이.
디즈니랜드의 불꽃놀이.

그러나 멋지고 화려하지만 가장 허무한 것이기도 하다. 쏘아올려진 불꽃이 하늘에서 화려한 볼거리를 뽐내는 시간은 불과 몇 초뿐이다. 한 발에 수억원을 호가하는 최고급 기술의 집약체인 '밤하늘의 빛나는 그림'도 하늘에 머무르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불꽃쇼는 낭비의 극치로 불리기도 한다.

요절한 예술가들의 짧은 삶과 그들이 남긴 불멸의 작품은 불꽃놀이와도 비견된다. 만일 벨리니와 비제가 87세로 사망한 베르디만큼 오래 살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걸작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최후의 걸작 청교도를 남기고 병사한 벨리니

벨리니가 어린 시절 그에게 음악의 기초를 잡아주었던 할아버지의 타계에 따라 고향에서 슬픔을 달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해를 넘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다시 파리에 구해둔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대인배 로시니는 파리의 살롱계에서 후배 벨리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벨리니는 친구 플로리모에게 보낸 1834년 11월의 편지에 “파리에서 가장 멋진 일은 로시니 선생이 나를 아주, 많이, 넘치게 사랑해준다는 일이라네”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그는 이미 1834년 3월부터 200년전 크롬웰이 이끌었던 영국의 청교도혁명을 소재로 한 <청교도>(I Puritani)를 마음 속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던 오스트리아에 저항하다 망명한 페폴리 백작(Count Carlo Pepoli)의 영향도 있었다. 그는 그리시와 루비니 등 그의 사단 성악가들에게 1835년 파리 초연후 1836년 나폴리 공연까지 염두에 두고 있음을 흘렸다. 대본을 쓰기로 한 페폴리 백작에게는 이렇게 주문했다. “오페라는 눈물을 자아내야 하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다가 노래에 죽어야 합니다.”   

그해 9월에 그는 대부분의 악보를 완성하고 다시 수정해서 12월에 로시니에게 보여줬다. <청교도>는 연말부터 연습에 들어가 1835년 1월 20일 파리의 상류층과 예술가들의 주목 속에 최종 리허설을 했고 나흘 뒤 초연은 예감대로 확실한 성공을 거두며 17회나 공연되었다. “내 친구여, 프랑스인들은 다들 미친 듯이 휘파람을 불어대고 소리를 질렀다네. 일주일 내내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내 이름을 연호하더군. 라블라슈(Lablache)는 신처럼 노래했고 그리시는 천사 같았지. 루비니와 탐부리니도 끝내줬어.” 절친 플로리모가 초연을 관람하러 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그에게 보낸 편지는 상기된 벨리니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벨리니는 이 작품의 성공으로 국왕 루이 18세(King Louis-Philippe)에게 영예로운 레지옹 도뇌르 기사(chevalier of the Légion d'honneur) 칭호를 받았고,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2세에게는 프란체스코 1세 기사단 십자훈장(the cross of the Order of Francesco I)을 수여받았다. 벨리니는 <청교도>를 프랑스의 왕후 마리 에멜리(Queen Marie-Emélie)에게 헌정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청교도 공연 장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청교도 공연 장면.

벨리니에게는 라나리가 이끄는 나폴리 극장을 위한 3개의 오페라 작곡의 숙제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성공에 고무된 그는 파리에 남아 프랑스식 그랜드 오페라를 쓰고 싶어했다.

그리고 결혼을 생각한 아가씨와도 만났다. 단 ‘그녀의 숙부가 20만 프랑의 유산을 넘겨주면’이라는 단서를 달아 서두르지는 않았다. 5년간 연인으로 지냈던 투리나 가문의 젊은 부인 쥬디타(Giuditta)와는 파리로 이주하면서 이미 헤어진 상태였다. 쥬디타는 1833년 5월 벨리니와 주고 받은 뜨거운 편지들이 남편에게 발각되어 이혼당했지만, 일에 집중해야 했던 벨리니는 더 이상 그녀와 엮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혼자 살다 1871년 사망했다.

5월에는 런던으로부터도 <청교도>의 성공 소식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서 벨리니에게는 어둠이 드리워졌다. 파리의 국립 가르니에(Garnier) 오페라는 새 극장장이 올 때까지 벨리니와의 협상을 연기했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는 그에게 충고했다. “당신은 천재니까 더욱 조심하시오. 화가 라파엘로도 모차르트도 요절했다오.” 벨리니는 이 충고에 오히려 오싹해졌다. 8월 하순 그는 설사병에 걸려 힘들어했다.

마담 주베르와 벨죠조소 공작부인(Princess Belgiojoso)이 함께 초대한 만찬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공작부인은 자신의 주치의 몬탈레그리(Montallegri) 박사를 보내주었다. 그의 보살핌에도 차도는 없었고 경련과 발작으로 오히려 병이 간의 농양 등으로 악화해 결국 그해 9월 23일 겨우 34살의 나이에 독신의 몸으로 숨을 거뒀다.  

빈첸조 벨리니의 초상화.
빈첸조 벨리니의 초상화.

벨리니를 아들처럼 아꼈던 로시니는 국왕의 명을 받아 음악가장을 선포하고 앵발리드 호텔 채플에서 장례 미사를 치르도록 준비했다.

벨리니의 주검은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Père Lachaise Cemetery)의 예술가 묘역에 안장되었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1876년이 되어서야 위치를 확인해 고향인 시칠리아의 카타니아 성당으로 이장됐다. 페르 라셰즈 묘지에는 역시 나중에 이탈리아로 이장된 로시니의 빈 무덤 옆에 그의 빈 무덤도 그대로 남겨뒀다. 오늘날 카타니아의 그라비나-크륄라스 궁전(Palazzo Gravina-Cruyllas)에는 벨리니 박물관(Museo Belliniano)이 자리하고 있다.

벨리니의 기품, 우수에 찬 선율의 아름다움은 19세기 많은 작곡가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창조적인 선율에 영향을 받은 쇼팽은 임종시 그의 아리아를 듣기를 원했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후배인 베르디는 “그의 길고 긴 유려한 선율은 유사 이래 없었던 것”이라 추앙했다. 칭찬에 인색한 바그너도 음악과 가사와 심리 묘사를 결합시키는 벨리니의 절묘한 능력에 매혹되었다. 리스트도 벨리니의 팬임을 고백했으며 심지어 스트라빈스키는 벨리니를 베토벤과 함께 '2대 B'로 올려놓기까지 했다. 유일한 예외는 동 시대의 베를리오즈 뿐이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카타니아시에 위치한 벨리니박물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카타니아시에 위치한 벨리니박물관.

마지막 역작 카르멘의 성공을 보지도 못한 비제 

비제는 교향곡 같은 장르보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기를 갈망했지만 불운했다. 하필 오페라 역사를 통틀어 당대 최고 거장들인 바그너와 베르디의 시대에 대부분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상당수의 작품들이 두 작곡가의 아류라고 평가절하 되는 상황이 빈번했고, 비제는 예민했던 감수성 때문에 자존감을 잃고 폭음에 빠지는 등 건강을 망가뜨리는 행동이 자주 나타났다. 타계한 스승 알레비의 둘째 딸인 17살 아름다운 소녀 즈느비에브와 1869년 결혼에 골인한 후에도 이같은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조르주 비제의 사진.
조르주 비제의 사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비제가 입대해 훈련을 받던 도중 프로이센이 승리해 프랑스 제2제국은 막을 내리고 제3공화정의 시대가 열렸다. 비제는 전쟁 후 다시 열린 파리 오페라에서 합창 지휘자를 맡기로 극장장 에밀 페랭(Émile Perrin)과 합의하였으나, 라이어(Reyer)의 오페라 <에로스트라트>(Erostrate)의 조기 종연 문제로 갈등 끝에 자리를 잃었다.

극도의 혼란 속에 사회주의자들의 해방구 파리 코뮌까지 끝난 1872년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 올리기로 한 작품들에 전념키로 하나 작곡은 완성되지 못했다. 단막 오페라 <자밀레>(Djamileh)는 주연 성악가가 32마디를 잊어버리고 넘어가는 바람에 1872년 5월의 초연에 실패했다. 비제의 유일한 위안은 7월에 얻은 아들 자크(Jacques)뿐이었다.

실망한 비제에게 카르발료(Carvalho)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우선 자신이 운영하던 극장 술집인 보드빌 극장(Vaudeville theatre)에서 공연 예정인 <아를르의 여인>(L'Arlésienne) 부수 음악이라도 하라고 제안했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소설이 원작인 <아를르의 여인>은 각색이 너무 복잡하게 되어 실패했지만 음악만큼은 라이어와 마스네(Massenet)에게 인정을 받았다. 이에 비제는 4개의 음악을 뽑아 <아를르의 여인 모음곡>으로 만들었고, 비제의 조력자였던 지휘자 파들루(Pasdeloup)는 관현악곡으로 연주해 비제는 모처럼만의 환영을 받았다.

한편 1872년 6월부터 비제는 오페라 코미크 극장을 위한 3막 오페라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 원작으로 선택된 것이 메리메(Prosper Mérimée')의 단편소설 <카르멘>(Carmen)이었다.

비제가 본격적으로 작곡에 착수한 것은 1873년 여름이었는데, 극장 측은 이 격렬하고 이국적인 원작이 적합한 선택인지 의심스러워 했고 이 때문에 작업은 늦어졌다. 의욕이 떨어진 비제는 그 사이 스페인의 기독교 영웅 엘 시드(El Cid)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돈 로드리그>(Don Rodrigue) 오페라 작곡을 시작했다. 파리 오페라에서의 상연을 꿈꾸었으나 파리 국 립 오페라의 화려했던가르니에 극장이 그해 10월 대화재로 폭삭 주저앉아버렸다. 그러다 1874년 초, 비제에게 전기가 찾아온다.

<카르멘> 프로젝트에 반대하던 오페라 코미크의 부극장장 뤼방이 사임한 것이다. 그는 작곡에 박차를 가해 여름까지 완성을 보았다. 여주인공으로 계약한 메조 소프라노 갈리-마리(Célestine Galli-Marié)도 자기가 맡을 캐릭터와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두 사람 사이 염문까지 생겨나 즈느비에브와 몇 달 별거까지 할 정도였다. 10월에 리허설이 시작되자 오케스트라는 이전과는 너무나 색다른 음악에 거의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불평을 해댔다. 특히 합창단은 각자 연기하며 담배도 피워야 하고 여성들은 싸움도 해야 한다고 하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들을 달래면서 나가느라 리허설은 계속 길어졌다. 비제가 영예로운 레지옹 도뇌르(Chevalier of the Legion of Honour) 훈장의 후보자에 올랐다는 소식이 3월에 공식화하자 그제서야 초연 날짜가 잡혔다.

시애틀 오페라의 카르멘 공연 장면.
시애틀 오페라의 카르멘 공연 장면.

역사적 초연에는 비제에게 첫 음악적 자극을 주었던 구노는 물론 마스네와 생상스(Camille Saint-Saëns)도 자리했다. 아직 마음이 덜 풀린 즈느비에브는 오지 않았다. 초연은 4시간 반이나 계속돼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마스네와 생상스는 격찬을 했지만 자신의 스페인 음악 차용 아이디어를 훔쳐갔다고 생각한 구노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신문들은 부적절한 여인을 영웅처럼 만들었다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댔다. 갈리-마리의 연기를 마녀의 화신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던 비제는 실망했다. 

줄담배를 피우고 폭음이 잦았던 비제는 1860년대 이래 과로까지 겹쳐 늘 건강이 좋지 못했다. 1868년부터는 친구 갈라베르에게 기관지 경련 증세도 호소했다. 1874년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기도 협착증’이라고 표현하며 고통스러워했고 <카르멘>이 초연하던 이듬해 3월에는 심장발작도 있었다. 초연 실패에 실망한 비제는 5월경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졌다. 한때 회복된 듯 해 센 강에서 수영도 했으나 6월 1일 갑자기 열병에 걸렸고, 다시 심장발작이 찾아왔다. 이틀 후 결혼기념일에 다시 발작을 일으킨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겨우 36세의 나이였다. 그의 돌연사 소식에 파리 시민들은 자살을 의심하기도 했다.

6월 5일에 성 삼위 성당(Église de la Sainte-Trinité)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구노, 토마, 마스네 등의 음악가와 비제와 알레비의 가족들을 포함한 4,000여명의 조문객들이 참석했다. 파들루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함께 했으며, <카르멘>의 멜로디를 주제로 한 오르간 환상곡이 연주되고 난 후 그의 유해는 페르 라셰즈 묘지의 예술가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번에는 구노도 그가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으려 할 때 생명이 꺼져버렸다며 애도했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 비제의 무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 비제의 무덤.

비제의 죽음을 애도하려 석달만에 다시 공연된 <카르멘>에 이번에는 모든 비평가들과 관객들이 비제를 일제히 칭송했다. 파리에 이어 빈 공연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니체는 이를 바탕으로 그를 '지중해의 바그너'라고 칭하면서 비제의 음악을 자신이 정리한 '디오니소스적'인 음악, 즉 원초적이고 감성적인 예술의 음악이라고 지칭하였다. <카르멘>, <아를르의 여인>에서는 극과의 절묘한 조화, 새로운 기법 등은 이후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 지아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등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쳐 사실주의 오페라의 시초가 되었다. 이 작품 하나로 비제는 주세페 베르디,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낭만주의 3대 국민 가극 작곡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평가받을 만큼 오페라에서 주요한 작품이 되었다. 

한편 <카르멘> 초연 전후, 프랑스 최고의 국가적 영예로 인정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상 후보자로 발표됐다. 하지만 선정 이유는 오해였는데, <아를르의 여인>이 당대의 명작가 알퐁스 도데가 쓴 동명의 희곡인 줄로 착각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후보자 발표 얼마 후 사망하는 바람에 실제 수상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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