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몸으로, 행동으로 쓴다는걸 실감한 날이었다. 필자는 지난 19(수) 오후 1시 20분경 양수역에 도착, 역사(驛舍)에 딸린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눈 내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작가 작업실이 있는 서종까지 갈 택시를 학생에게 부탁하였다. ‘서종까지 가실 거죠?’란 물음이 웬지 아득하게 들려왔다. 

필자는 작가들이 머무는 양평을 자주 오간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도 있지만 서울 이촌역에서 갈아탄 경의중앙선으로도 종종 다닌다. 보통은 미리 작가들과 약속한 후 마중 나온 차로 이동하였으나 이번에는 미리 연락하지 않았다. 눈으로 인해 택시 정류장에 없는 택시를 부르기 위해 좀 멀리 간다고 해야 예약이 되는 것 같았다. 
   
맞은편 도로에서 제설차가 오며 눈을 치우고 있었다. 문호리에 들어서고 택시는 버스 차고지를 지나 산지(山地) 주택가 쪽으로 들어섰다. 길이 익숙하지 않은지 기사가 ‘여기 와 보셨죠’ 묻는다. ‘이 곳은 작가들이 많이 삽니다’, ‘서울대 미대 교수를 오래 전 그만둔 작가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다. 

서용선 작가 2020년 9월 / 사진 = 이승은
서용선 작가 2020년 9월 / 사진 = 이승은

서용선 작가와는 2020년 9월 이후 1년 4개월여 만에 마주 앉았다. 특유의 천장 높은 작업실 벽면 한쪽에 체이스 은행 로고가 박힌 대형 작품이 완성을 앞두고 있었다. 

코로나 팬데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 전시 또한 뜸하거나 그나마 기획자를 잘못 만나 제대로 홍보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난 기간 동안 중요 전시로 <서용선의 생각-In Thinking 가루개 프로젝트>를 들었다. 2020년 5월부터 2021년 4월까지의 프로젝트를 한달여 강남의 갤러리에서 하는 전시였다.

서용선은 ‘그림은 많은 부분이 언어에 의존한다’고 본다. 순수한 이미지 작업만의 추구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글도 그림 아닌가?’라는 근본적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동양은 ‘서화’(書畫)라는 말에서 보듯 글이 그림보다 우위를 점했다. 서양에서도 1960년대 후반 등장한 개념 미술은 생각, 즉 언어를 미술의 본질로 본다. 30년 이상 매달리며 그리는 '단종의 죽음'이 우리나라 글자 훈민정음 창제 및 반포 시대와 겹치는 것 또한 '서용선 미술'의 본질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작가는 자신이 왜 그림을 그리게 되었나, 어떻게 영향 받았나를 되돌아 보았다. 1960년대 10대 시절, 영화, 소설 등에서 미술 관련 글을 접했다. 1970년대 군에 다녀와 입학한 미술대학 역시도 문학 잡지 등에서 이중섭이라는 존재를 인지하였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었다. 글 쓴 이들은 어차피 중요하지 않았다. 글 자체를, 미술을 이해하는 매개로 인식하였다.

철거 예정인 경기도 양평 문호리 가루개 마을 빈 집에서 벌였던 ‘생각 중’ 프로젝트는 언어를 바탕으로 한 텍스트가 회화의 주된 조형 수단으로 다루어졌다. 프로젝트 현장에서 제작된 작품들과 활동에 대한 기록물들이 전시되었다. 

가림토(加臨土)글자. 40.7*30.5 / 사진=서용선 아카이브
가림토(加臨土)글자. 40.7*30.5 / 사진=서용선 아카이브

서용선은 프로젝트 시작부터 매일 집 담벼락에 떠오르는 생각과 일상 속 단어들을 썼고 실내 작업에서는 더 구체화하여 문장, 다른 문자들이 섞이고 형상 이미지들이 함께 어우려졌다. 작품은 콜라주 방식의 평면 작업을 비롯하여 벽면, 문짝, 박스 종이, 커튼 천, 건축 자재인 유리창과 콘크리트 벽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제작했다. 이 작업은 회화 재료인 물감보다 일상의 사물이 가진 물질성과 재료에 내재된 리얼리티를 가져온다.

2019년 가진 세 번의 전시, '서용선의 머리_갈등' '통증, 징후, 증세…서용선의 역사 그리기' '4월 산을 넘은 시간들' 틈틈이 콜라주 작업을 하면서 재료를 보려했다. 그린다는 것은 갖다 붙이는 행위라고 본다. 음식 포장지, 약의 캡슐 등 일상의 물건이 재료가 되었다. ‘생각 중’ 프로젝트도 이러한 것을 어떻게 조합해서 보여주느냐가 회화·설치 작업이라고 본 연장선상이었다. 

몸짓 65×92.3×12. Acrylic, Oil bar on concrte. 2020/ 사진=서용선 아카이브
몸짓 65×92.3×12. Acrylic, Oil bar on concrte. 2020/ 사진=서용선 아카이브

빈집 내부에는 벽, 문, 창 등에 작가의 생각이 담긴 드로잉이 채워졌다. 연주회, 토론, 퍼포먼스 공연 등을 통해 지역민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가졌다. 

작가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실행하다 보니 작가가 대로에 인접한 농가를 사들여 자신의 전시장으로 설계한다는 잘못된 소문도 돌았다.   

집 벽의 수많은 단어들에서 가장 빈도가 높았던 것이 사람 이름이다. 서용선의 관심은 여전히 인간을 탐구하는 여정 속에 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 기호는 먼저 형태로 다가온다. 훈민정음은 소리 언어에 형태를 부여하여 만든 문자이지 않나. 책의 한 구절씩을 인용한 텍스트를 조형 요소로 하는 작품은 지하철역 이름이나 간판 그림을 그렸던 날짜 등으로 이미지 사이에 적지 않게 나타났었다. 서용선에게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언어적 개념에 대한 문제 의식이 내재되어 있었다.

북한강로 40.8×52.8 Acrylic on canvas 2020~2021 / 사진=서용선 아카이브
북한강로 40.8×52.8 Acrylic on canvas 2020~2021 / 사진=서용선 아카이브

1970~1980년대 한국 미술은 이야기를 배제하려는 추상이 주류였다. 서용선이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던 1980년대는 백색 모노크롬이 대세였다. 동양화에서도 시제(詩題)를 쓰지 않는는 등 서화일치론의 그림자마저도 희미해지고 대학에서도 텍스트는 배제되었다. 다른 한편 이응노(1904~1989), 남관(1911~1990), 김창열(1929~2021), 박서보(1931~ )의 에크리튀르(écriture·쓰여진것) 등과 같이 문자 추상, 문자를 회화의 영역으로 수용하는 경향도 여전히 존재했다.

19세기 말~20세기 전반기 모더니즘은 미술에서 문자를 배제하였다가 20세기 중반 이후 입체주의 콜라주, 초현실주의, 다다, 개념 미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며 문자를 재주목한다.  

현대 미술에서 텍스트가 읽는 대상에서 보는 대상, 즉 이미지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고전문학과 그리스·로마 신화, 역사를 주제로 그린 사이 톰블리(Cy Twombly. 1928 ~2011), 그래픽 디자인을 설치 작품으로 확대한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 1945~ ) 등의 작품들에는 텍스트가 핵심 대상이다. 서용선은 ‘글자에서 연상되는 형상을 거부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전시에는 벽면을 잘라낸 벽화가 옮겨져 전시되었다. ‘뱉어내는 몸짓의 말과 글’, ‘움직이는 몸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공간’, ‘관음의 일상을 기호화한 그림기호’라는 텍스트들은 현장의 공간 느낌을 대변하고, 언어와 현상학적 경험이 축적된 인간 몸과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언어는 이를 지각하는 몸을 가진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움직이는 몸은 언어를 살아있는 것으로, 말을 계속 생성(生成)하고 또 지각(知覺)한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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